“아아아아아악~~!” 지난 19일 새벽 1시 35분경.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의 ○○아파트 한 집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공포스럽게 울려 퍼졌다. 의처증에 걸린 한국인 남편이 잠을 자고 있던 필리핀 출신의 부인과 딸에게 둔기를 휘두른 것. 엽기 남편의 폭행으로 아내(27)는 중태, 큰딸(3)과 작은딸(2)이 숨지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다. 부천 남부경찰서는 부인과 딸에게 둔기를 휘둘러 딸 2명을 숨지게 한 혐의(살인)로 A(34)씨를 체포했다.

사건 이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남편A씨의 태도를 비난하는 게시물과 뉴스 댓글이 봇물을 이루고 있어 이번 사건의 심각성을 대변해주고 있다. ‘고향땅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하물며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한국 남편 하나 믿고 온 외국인 여성들의 외로움이야 오죽할까. “외롭다마다요. 한국말도 아직 서투른데…”자신을 피해자와 직장동료라고 소개한 B씨의 말이다. B씨에 의하면 A씨의 아내 L씨는 공장에 다닌다. 오전 8시부터 오후9시까지 뼈 빠지게 일한다. 녹초가 돼 집에 가도 L씨는 두 다리 뻗고 쉬지도 못한다. 언제 불똥이 튈지 모르는 남편의 의처증 때문이다.

가족들의 도움이 절대적 필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남편한테 맞고 산다고 하더라고요.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라고 반문하며 B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B씨는 “어린 애들이 무슨 죄라고…부모 잘못 만난 죄밖에 더 있나요…”라며 가슴 아파했다. B씨의 말대로라면 남편 A씨는 ‘가정폭력’의 온갖 만행을 일삼는 천하의 몹쓸 인간. 그러나 경찰측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소 의아해진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말수가 적고 차분한 A씨의 모습에 경찰은 ‘설마’했다고 귀띔한다.

체포 당시 A씨는 여느 살인자처럼 눈에 독기를 품고 있거나 이성을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는 것. A씨는 살인 후 겁에 질린 나머지 부엌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이후 경찰이 추궁하자 A씨는 자신의 범행을 시인했다. 그렇다면 A씨는 왜 이같이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을까. 경찰조서에 따르면 A씨는 5년 전 필리핀 출신의 아내 L씨와 결혼한 뒤 심한 의처증에 시달렸다. 공장 다니는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했고 혹시 퇴근이 다른 날보다 늦기라도 하는 날엔 견딜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A씨는 자신의 심한 의처증세에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A씨는 신경 정신과에서 1주일 동안 치료를 받기도 했다.

편집증 부모기질 ‘대물림’돼 >이 시기와 맞물려 A씨는 최근 아내가 셋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A씨의 의처증세는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 ‘내 아이가 맞을까?’, ‘혹시 다른 남자의 아이는 아닐까?’ 등 A씨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에 A씨는 순간적으로 ‘절대 해서는 안 될’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한양대 구리병원 신경정신과 박용천 교수는 “의처증이 부른 한 가정의 비극”이라며 가정환경을 새삼 강조했다. 성장과정에서 부모가 적대적이고 지배적이어서 아이에게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끼게 하거나 부모가 편집증이 있는 경우 아이에게도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이주여성인권센터 관계자는 “사실 국제결혼에 대한 부작용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라며 “한국 남성은 외국인 여성과 결혼할 때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점을 감안하고 자신보다 못사는 나라의 여성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A씨의 아내 L씨는 시댁식구의 보호 아래 순천향대학 부천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상태다. L씨는 머리를 크게 다쳐 현재 중태에 빠져 있으나 뱃속의 태아는 무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지만, 일단 위험한 고비는 넘긴 상태입니다.” 병원장의 말에 따라 L씨의 육체적인 고통은 조만간 쾌유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린 두 딸을 잃은 슬픔, 남편에 대한 증오심 등으로 볼 때 L씨의 완전한 정신적 쾌유는 긴 시간을 필요로 할 것으로 보인다.

# 한양대 구리병원 신경정신과 박용천 교수“의심도 심각한 질병”

‘의처증’에 대해 뭐든지 물어보라’며 기자를 반기는 박 교수. 그는 ‘의처증’에 대한 설명에 앞서 장난스러우면서 심오한 충고 한마디를 던졌다. “애초에 집착끼(?) 있는 사람과 결혼하면 안됩니다.” 그는 이어 “집착과 사랑은 별개”라며 “잘해주는 것만으로 결혼하면 낭패볼 것”이라고 단단히 충고했다. ‘의처증’이 대체 얼마나 무서운 병이기에 대뜸 충고부터 하는 것일까. 박교수에게 물어봤다.

▲ 의처증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 편집증적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 성장과정에서 부모의 영향으로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다. 아내로 인해 자존심이 상해 ‘의처증’ 증상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 증상은 어떠한가.
- ‘망상’이 심하다는 것이다. 평소 이들의 모습은 ‘정상’이기 때문에 배우자 외에는 그 문제를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상담은 많지만 실제 치료는 어려운 실정이다.

▲ 치유는 가능한가.
-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이들에게 비판,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아내는 남편을 최대한 이해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등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다. 약물치료도 있으나 이를 피해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워 약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줘야 한다. 또한 병원에 데려오거나 입원을 권유할 때 배우자 가족보다 친가족이 병원으로 유인하는 것이 환자에게 거부감을 덜 느끼게 할 수 있다.

▲ ‘의처증’이라는 병에 대한 의료계의 시각은.
- ‘의심도 심각한 질병’이라는 것이다. ‘의처증’은 결국 ‘가정폭력’으로 이어지고 이를 아이들이 그대로 보고 배우며 그것이 집안 대대로 ‘대물림’되는 것이다. 우스갯소리지만 의심 많은 남자와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