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재벌가 회장 아들’이라고 속이고 전문직 여성을 상대로 수억대 사기극을 벌인 한 30대 남성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주인공은 무직에 전과까지 있는 전문사기범 박모(30)씨.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7일 의사, 항공사 승무원 등 전문직 여성들을 속이고 5억여원을 가로챈 혐의(사기)로 박씨에게 징역 8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사기죄로는 이례적인 판결이다. 한 남성의 허영과 탐욕이 빚어낸 이 사건은 일확천금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우리네 세태에 대한 단상을 담고 있어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세련된 매너와 말투로 위장

검찰에 따르면 이 사건은 박씨가 2001년 서울 강남의 한 병원 주차장에서 김모(여·의사)씨를 만나면서 시작됐다. 김씨의 직업이 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박씨는 주차 문제로 일부러 시비를 걸어 다툰 후 그녀로부터 미혼의 후배 여의사 이모(39)씨를 소개받았다. 강남에서 잘나가는 성형외과 원장인 이씨는 박씨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외모는 동안이었다. 게다가 60평대 고급 아파트에 살고 월수입도 2,000~3,000만원에 이르는 재력의 소유자였다.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박씨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박씨는 이씨에게 “나는 국내 굴지의 K그룹 회장 외아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명문대를 나와 내로라하는 외식업체 등 여러 곳을 운영하고 있다”는 박씨의 말에 이씨는 박씨에게 호감을 가졌다.박씨는 의사인 이씨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녔고 명품 옷으로 온몸을 휘감고 다녔다. 박씨의 화려한 옷차림, 세련된 매너와 말투, 화끈한 돈 씀씀이를 보며 이씨는 박씨가 ‘재벌가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국내 K그룹과 D그룹은 오너 일가가 모두 박씨였던 터라 이씨는 박씨의 거짓말에 쉽게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박씨는 이씨에게 “돈을 빌려주면 코스닥에 투자해 엄청난 이익을 내주겠다”고 꾄 뒤 이씨로부터 ‘급전’ 1억7천만원을 요구했다. ‘재벌 2세’라는 한마디에 이씨는 박씨에게 한치의 의심도 없이 돈을 적극 건넸다.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리자 그후로도 박씨는 이씨에게 사업상 명목으로 여러 차례 돈을 요구했다. 이렇게 해서 만난 지 두 달 만에 박씨가 이씨에게 받아낸 돈은 4억5,500여만원. 이씨는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적금을 해약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과시하기 위해 씀씀이 ‘펑펑’

박씨는 돈을 빌릴 때마다 “돈을 부풀려 새 병원 개원자금을 만들어주겠다” “아버지가 평창동의 대저택에 살고 계신데 난 강남 요지의 고가 아파트 여러 채를 물려받을 것이다”는 등의 말로 이씨를 안심시켰다. 박씨의 사기행각은 이씨에게만 그치지 않았다. 박씨는 2001년 1월 서울 청담동의 J의류점에서 지배인 박모(여)씨에게 접근해 “옷을 외상으로 주면 곧 현금 결제해 주겠다”고 속여 2개월 동안 1,610만원어치의 의류를 받아 가로챘다. 또 한 렌터카 업체의 강남지점장을 만나 “D그룹 회장의 외아들인데 임시로 차가 필요하다”며 고급차를 장기대여한 뒤 재벌2세 행세를 하는데 활용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에는 항공사 승무원 전모(여)씨에게 신용카드를 빌린 뒤 22차례에 걸쳐 1,650만원 상당의 현금서비스를 받고 물품을 구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해서 박씨가 여성들로부터 받아 가로챈 금액은 총 5억여원에 달한다.

신분 들통나자 협박하기도

그러나 이 같은 사기 행각은 이씨가 박씨의 신원 확인과 돈 문제를 추궁하면서 들통나기 시작했다. 뒤늦게 속은 사실을 알아차린 이씨가 사설경호원을 고용, 뒷조사를 했던 것. 그제서야 이씨는 박씨가 무직에 전과가 있는 전문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명문대를 나왔다는 것도, 재벌가의 회장 아들이라는 것도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됐다. 자신을 뒷조사한 이씨에게 앙심을 품은 박씨는 범행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이씨를 거칠게 협박해 입을 막으려던 것. 이에 박씨는 같은 해 7월 27일 오전 10시40분께 강남구 이씨의 병원 앞길에서 자신이 렌트한 다이너스티 승용차로 이씨와 이씨의 사설경호원 2명을 들이받았다.

이씨와 경호원들은 중경상을 입었다. 박씨는 이씨 등을 치고 달아나다 역삼동 도로가에 주차된 차량 2대를 들이받고 빌딩가 골목길로 도주했다. 그러나 뒤따라온 이씨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혀 박씨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검찰 관계자는 “이씨 등 여성들이 박씨의 겉모습만 보고 돈을 퍼다 줬다”면서 “K그룹, D그룹쪽 사람들을 확인만 했더라도 이런 황당한 사기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재벌 2세’ 행세를 해온 박씨는 외모는 평범했지만 언변은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의 평소 언행을 보면 최상류층 재벌임을 의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박씨는 재벌이기는 커녕 지난 1999년 4월 ‘재벌 2세’를 사칭하다 구속된 바 있는 전과범인 것으로 드러났다.

1년 4개월 만에 구속에서 풀려나와 또다시 비슷한 행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8부(허만 부장판사)는 지난 27일 이씨 등 총 4명의 피해자에게 사기행각을 벌여 5억여원을 가로챈 박씨에게 “사기죄로 1년 4개월간 복역했음도 불구하고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점, 재벌2세를 사칭하면서 5억원이 넘는 금품을 편취한 점, 사건을 무마하려는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상해를 가한 점 등으로 볼 때 사안이나 죄질이 무겁다”며 “이에 징역 8년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후진국형 범죄인 유력인사 또는 재벌 사칭 사기사건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사기성’이 있다”면서 “쉽게 큰 돈을 벌려는 이들이 영락없이 사기꾼에 걸려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된 것”이라며 쓴소리를 덧붙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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