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소수 대학과 중·고교생들의 수업 거부로 촉발된 홍콩의 민주화 시위가 확산돼 한때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이젠 수백명으로 줄어들었지만 민주화를 향한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홍콩 시위를 “우산 혁명”이라고 한다. “우산 혁명” 호칭은 경찰의 물대포와 최루탄 진압에 맞서 시위 시민들이 모두 우산을 펴 방어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홍콩은 1997년 영국 식민통치에서 중국으로 넘겨졌다. 중국은 1984년 영국과 ‘공동 선언’을 통해 홍콩 주민의 기본권과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중국은 또 홍콩을 접수하면서 50년 동안 홍콩을 ‘1국 양제(兩制:2체제)‘ 원칙에 입각해 홍콩인들의 자유를 보장키로 했다.

하지만 중국은 ‘1국 양제’를 벗어나 홍콩 내정에 간섭해왔고 2012년엔 ‘국민교육 과정’을 새로 도입해 초·중·고 학생들에게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고 애국심을 고양키로 했다. 홍콩 주민들은 새 ‘국민교육’이 “중국 공산당의 세뇌 교육”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50만 명이 ‘국민교육’ 반대 평화시위에 나섰고 중국은 ‘국민교육’ 계획을 철회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자회의(전인대)는 지난 8월31일 홍콩의 행정수반인 행정장관 선거를 2017년부터 기존의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개정하였다. 그렇지만 전인대의 8.31 개정은 속임수였다. 직선제를 실시하되 1200명의 후보추천위원회에서 후보로 추천된 자만이 출마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후보추천위는 압도적으로 친중 인물로 구성되었다는데서 원천적으로 친중 인물만의 출마로 묶었다. “우산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홍콩인들은 보통 선거권에 입각한 자유선거 실시와 렁친잉(梁振英) 행정장관의 즉각 사퇴를 요구하며 시위에 돌입했다.

700백만 홍콩 주민들은 중국에 귀속된 후 17년간 자신들도 중국처럼 언론자유와 사법부 독립이 박탈되고 인권이 말살되리라는 불안감 속에 살아왔다. 젊은 세대는 부모와는 달리 홍콩에서 태어남으로써 중국 본토와 정체성을 달리한다. 홍콩 주민들은 연간 4000만 명씩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 관광객과 기업인들을 “메뚜기떼”라고 비아냥댄다. 모든 곡식을 남김없이 갉아먹는다는 뜻이다. 중국의 관광객과 기업인 투자로 홍콩 경제가 커지기는 했지만, 그들로 인해 아파트 값은 지난 10년간 300%나 급등했는데 반해 임금은 고작 3% 상승에 그쳤다. 소수 기업 지배계층과 저소득층 간의 빈부격차를 악화시켰다. “우산 혁명”의 씨앗이 되었다.

홍콩인들은 1989년 6월4일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 학살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들도 시위에 나섰다가 중국군에 의해 수백명이 학살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중국이 자신들의 민주화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모르지 않는다. 중국이 시위대와 반시위대 간의 폭력 충돌을 조장하거나 시위를 서방 국가의 음모와 선동에 의한 것이라고 덮어씌우고 무력진압에 나설 수 있다는 점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위대는 중국에 무력진압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질서를 지켜야 한다며 평화적 시위를 호소했다.

시위대는 렁친잉 행정장관이 사임하지 않고 자유선거를 보장하지 않는 한 물러설 수 없다고 버틴다. 그에 반해 중국 지도부는 시위대에 굴복한다면 위구르, 티베트, 마카오 등의 자치 운동을 격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그로 인해 홍콩 시위대와 중국 당국 간의 긴장과 대결은 한동안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마우쩌둥(毛澤東)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고 총구로 권력을 유지했다. 중국은 마우쩌둥의 말대로 “총구“를 통해 홍콩을 지배하려 할 게 분명하다. 홍콩 자유시민의 “우산 혁명”과 중국 공산당의 “총구 권력”이 격돌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세계 자유국가들은 자유 수호를 위해 “총구“를 두려워하지 않는 홍콩 주민들의 “우산 혁명“에 박수를 보낸다.


정용석 교수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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