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탑승 4시간 동안 무슨 일 있었나?


이달 초 익산에서 택시기사 김모(47)여인을 살해한 범인이 사건발생 8일 만인 지난 10일 경찰에 자수했다. 그러나 용의자 김모(35·운전기사)씨의 석연찮은 진술 탓에 사건의 실체가 완전히 드러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자수한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김 여인을 벽돌로 내리쳐 살해한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경찰에게 안부 전화를 받은 김 여인이 자신을 신고한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씨는 피해자를 성폭행 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의가 발가벗겨진 채 발견된 김 여인의 시신은 성관계를 가진 흔적이 역력했다. 김씨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두 사람이 합의에 의한 성관계를 맺은 뒤 경찰의 전화가 걸려왔고 그 직후 범행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김씨의 직접적인 살해 동기가 성폭행 과정에서 생긴 다툼 때문이 아니라 ‘경찰과 연락한’ 김 여인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는 추리가 가능한 대목이다. 김씨는 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피해자의 입을 막아야 했을까.

범인 김씨가 피해자의 택시를 탄 순간부터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두 사람은 약 4시간 동안 함께 다녔다.

사건 직전 김 여인과 통화한 경찰의 ‘피해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진술로 미뤄 김 여인은 함께 술잔을 기울일 만큼 김씨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지난 2일 밤 9시 반쯤 익산시 모현동 사거리에서 김 여인이 운전하는 택시를 탔다. 김씨가 밝힌 행선지는 ‘금강 하구둑’. 하지만 김씨는 목적지에서 내리지 않았다. 이들이 탄 택시가 약 두 시간 뒤인 이날 밤 11시 40분 쯤 전주-군산 간 산업도로에서 CCTV에 포착됐기 때문이다. 김씨가 처음 탄 곳에서 차로 30~40분 정도 걸리는 곳을 두 사람이 2시간에 걸쳐 함께 이동한 것이다.


함께 술 마신 정황 있어

경찰에 따르면 김 여인은 이 시간 동안 회사 동료와 두 차례 전화통화를 했다.

김 여인의 동료기사 A씨는 경찰 조사에서 “(김 여인이) 처음엔 ‘젊은 오빠가 데이트’라고 했다. 얼마 뒤 다시 전화를 걸자 ‘교대 시간 못 맞추겠다’는 말을 하더라”고 진술했다.

그는 또 “우리 회사엔 원래 교대 시간이 없다. 이는 보통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남들 몰래 동료기사에게 상황을 전하기 위한 암호가 틀림없다”고 설명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A씨는 김 여인과 두 번째 통화를 한 직후 관할 경찰서에 실종의심신고를 했다.

경찰은 수차례에 걸쳐 김 여인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었고 사건이 일어날 무렵인 새벽 1시경 김 여인과 통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피해자가 위협 받고 있다는 어떠한 정황도 찾을 수 없었다.

여러 번 ‘정말 괜찮으냐’는 질문을 던졌지만 ‘괜찮다. 아무 일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던 것. 경찰은 전화를 끊은 뒤 A씨의 신고를 접수목록에서 빼버렸다.

하지만 정작 끔찍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김씨의 진술에 따르면 조수석에서 졸고 있던 그는 김 여인의 통화를 엿듣고 피해자가 자신을 경찰에 신고한 것으로 오해했다. 김씨는 곧 피해자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고 큰 다툼이 벌어졌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싸움 끝에 택시에서 내려 위에 있던 벽돌을 주워 피해자를 내리쳤다”고 말했다. 경찰 신고를 두려워한 나머지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미리 흉기를 준비하지 않고 택시 밖에서 벽돌을 주워왔다는 점 또한 순간적으로 일을 저질렀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살인은 계획에 없었다”

하지만 김씨와 피해자 사이에 성폭행 사실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초 김 여인이 강간당한 뒤 살해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던 수사팀 내에서도 김씨가 실제 성폭행을 저질렀는지 여부에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익산 경찰서 관계자는 “사건 직전 경찰과 통화한 피해자의 태도가 안정적이었고 용의자 본인이 성폭행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어 추가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또 김씨가 피해자를 강간하지 않았음에도 경찰 신고를 막으려했던 것으로 미뤄 숨겨진 여죄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김씨는 13년 전인 1995년 2명의 여성을 성폭행했다 붙잡혀 3년 6개월을 복역한 전과자이기 때문이다.

김씨가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데도 유사 범죄 전과자인 그의 지문 일부가 피해자 택시 안에서 나온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경찰은 추가 조사가 마무리 되는 대로 김씨에 대해 살인과 사체 유기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예정이다.

한편 김씨는 범행을 저지른 직후 최근 출산한 아내가 입원해 있던 모 산후조리원에서 하루를 머물었다. 그 뒤 김씨는 전주와 완주 등을 배회하다 지난 5일 오후 수원으로 도피해 찜질방 등지를 전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과 부인의 권유로 김씨는 지난 10일 오후 전북 익산시 동산동 한 웨딩타운 앞에서 경찰에 자수, 8일 간의 짧은 도피생활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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