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문민정부의 “넘버3"

칭찬도 인색하지 않았다. 한 번은 내가 신문과 벽시계 시계바늘을 고쳐 놓았더니 그는 “시계가 틀려도 아무도 신경을 안 썼는데 새로 전입해 온 직원이 바로 고쳐 놓았다"며 공개적으로 나를 칭찬했다. 그 때부터 나는 졸지에 기획관의 최측근으로 분류되었다.

후에 내가 대정실을 떠날 때 이 기획관은 많이 아쉬워하는 듯 했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훌륭한 언론 담당관으로 키우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외국으로 연수 나간다고 인사 갔을 때에도 특별히 불러 전별금 봉투를 건네주기도 했다.


미 CIA 국장 보안 유출소동

하루는 같이 배치 받은 동기가 “할 얘기가 있다"며 “복도에서 좀 보자"고 했다.

복도에서 그는 대뜸 나에게 “네가 사무실에서 너무 잘하는 바람에 내가 상대적으로 못하는 것으로 비쳐져 불편하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러면서 “차라리 같이 좀 못하자. 선배들에게도 깍듯이 할 게 아니라 적당히 말도 놓고 쉽게 지내자"고 제안해 왔다.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조금 황당했다. 신입직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 때문에 시기를 받을 줄은 몰랐다. 내가 동기의 입장에 대한 고려가 부족했는지 반성해 봤지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정보기관이란 곳이 가치가 전도된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이로구나’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동기는 그 후 이종찬 원장 시절 모 기업을 담당하는 수집관으로 활동했는데 돈 문제로 인해 면직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집권당의 당직을 맡고 있는 경기고 선배인 이모 의원에게 긴급히 구명을 요청한 덕에 간신히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었다.

내가 신문과에 발령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울시 미 CIA 국장의 방한 사실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극비로 방한한 우방국 정보기관장의 동선이 언론에 노출되었으니 보안사고가 크게 터졌던 것이다.

한겨레의 사회부 기자들이 울시 국장의 방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국방부 청사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행사진행 요원들이 가까이서 찍은 필름은 압수했지만 망원렌즈로 찍은 사진은 뺏지 못했다고 했다.

사건이 일어난 후, 감찰실에서는 어디에서 보안이 새 나갔는지 파악하느라 한바탕 소동을 벌였다. 하지만 끝내 유출자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아마추어 청와대에서 누설되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문민정부에서는 이러한 보안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그 점에서는 참여정부의 행태와 많이 닮았다. 이는 준비 안 된 아마추어들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 때 특종을 주도한 한겨레 사회부의 이모 기자는 그 후 노무현 정권에서는 기자협회 회장이 된 모양이다.

한겨레신문 사회부는 문민정부 내내 정권을 꽤나 물고 늘어졌다. 한겨레는 팀을 조직하여 김현철을 파파라치처럼 집요하게 따라 다녔다.

한겨레는 김현철이 고려대에 편입하기 전 한성대 출신이라는 사실을 취재하여 보도할 시점을 저울질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정권 차원에서 김현철에 관한 정보가 가장 민감한 현안이었다.

한겨레의 특종으로 ‘물먹은’ 여타 신문들이 후속 취재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일보의 박모 기자가 ‘러시아의 해외 정보기관(SVR)의 프리마코프 국장이 93년 말에 방한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특종 보도했다. 알고 보니 박 기자는 나와 동년배로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이었다.

서양 속담에 ‘남의 집 잔디가 더 푸르게 보인다’고 하더니 그 때 내 처지가 좀 그랬다. 특종 기자가 부러운 건 아니었지만 정보기관에 들어와 허드레 일이나 하고 있는 내 처지가 조금 한심해 보이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보도가 나간 직후 또 다른 어느 신문은 한 발 더 나아가 ‘한, 미, 러 3국의 정보기관장이 서울에서 만나 한반도 문제를 논의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 기사는 너무 오버한 것이었다. 순전히 추측에 근거한 습작 수준의 소설이었다. 언론사간의 과다 경쟁이 빚어낸 해프닝이었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우리나라 언론의 현주소랄까, 수준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나의 신문과 생활은 의외로 빨리 끝났다. 대공정책실 부속실 보좌원으로 불려 갔기 때문이다. 신문과에 배정된 지 한 달여가 지난 즈음, 새로 대정실장으로 부임한 오정소 실장이 나를 대공정책실 부속실의 보좌원으로 불렀다. 보좌원도 대개 보좌관이라고 부른다.

혹자는 ‘새끼 보좌관’이라고 하기도 한다. 보좌원은 대개 6급이나 7급 직원 중에서 뽑는 게 관례였다. 신참 직원 중에서 부서에 배치된 지 대략 1, 2년이 지나 부서 돌아가는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직원 중에서 뽑았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보좌원으로 불려간 것은 일종의 행정착오 때문이었다.


행정착오(?)로
대공정책실 보좌원으로

오정소 실장은 내가 부서에 온 지 좀 된 직원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그냥 나의 학력이나 이력 등을 대충 보고 뽑은 게 틀림없었다. 신문과장은 내가 부속실로 불려가는 걸 못마땅해 했다. 그는 나에게, “오 실장과 무슨 사이냐? 어떻게 해서 부속실로 가게 됐느냐?"며 취조하듯 따져 물었다. 그러다 내가 부속실로 인사 조치될 것이 확실해지자 그는 금세 태도를 바꿨다. 별안간 아부모드로 돌변했다.

그 후 그는 부속실에 올 때마다 나에게 ‘보좌관님’이라며 깍듯이 존칭어를 썼다. 보좌관에게 잘못 보이면 불편해 진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잘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국정원 간부들은 겨자씨만한 권력 앞에서도 비굴해지는 경향이 있다. 정보기관에 오래 근무하다 보면 체질이 그렇게 바뀌나 보다. 나는 이런 행태도 일종의 ‘직업병적인’ 증세라고 진단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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