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왕건(王建, 877~943)은 서기 877년 예성강을 근거지로 삼은 신흥 호족인 왕륭(王隆)과 부인 한(韓)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륭에게 풍수지리 대가 도선(道詵)이 찾아와 삼한(三韓)을 재통합할 영웅이 탄생할 집터를 가르쳐 주었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고려사 태조 조(條)에 왕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지혜가 있고, 용의 얼굴에 이마의 뼈는 해와 같이 둥글며, 턱은 모나고 안면은 널찍하였으며, 기상이 탁월하고 음성이 웅장하여 세상을 건질 만한 도량이 있었다.”


신라 말기에는 중앙 귀족들이 왕위 다툼과 ‘장군’, ‘성주’라 칭하는 80여명의 호족들의 등장, 각지의 농민 봉기 등으로 말미암아 왕권이 미치는 범위는 경주 일원에 불과했다, 삼한에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왕건은 천재성에 있어서 궁예에 미치지 못했고 야전 병법이나 외교술에 있어서 견훤에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나 왕건은 궁예와 견훤에게 부족한 덕을 가진 덕장(德將)이었다. 우리 역사상 영웅호걸들 가운데 왕건만 한 덕인(德人)은 찾기 어렵다. 왕건은 중국사에서 덕망있는 창업군주로 손꼽는 한고조 유방이나 송태조 조광윤보다 월등한 인물이었다,

시중(수상) 왕건도 시도하지도 않았던 모반의 죄목으로 목숨이 떨어질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궁예 휘하의 구장(舊將)들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왕건을 찾아와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했다. 왕건은 처음엔 망설였지만, 부인 류씨의 ‘인(仁)으로 불인(不仁)을 치는 것’이라는 권유에 설득되어 추대 속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정하였다(918).

왕건이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당나라를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이룩(676)한 지 260년 만에 민족을 재통일(936, 후백제 항복)한 외교전략은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부전이승(不戰而勝) 전략’과 신라의 골품제를 뛰어넘는 ‘개방화 전략’이다.

첫째, ‘호족연합과 혼인동맹’이다. 왕건은 지방 호족들을 포섭하고 견제하는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였다. 호족과 ‘혼인동맹(후비 29명)’을 맺었으며,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사심관제도’와 ‘기인제도’를 활용하였다.
둘째, 군웅들을 안심시키는 ‘포용의 리더십’이다. 왕건은 하찮은 장군에게도 머리를 숙이고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 없었다. 항복만 하면 땅도 빼앗지 않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위와 이권을 그대로 보장해

줬다.

셋째, ‘2(고려+신라) 대 1(후백제) 전략’이다. 왕건은 후백제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와는 우호적인 정책을 폈다. 천하쟁패전에서 정통성 있는 신라를 포섭하는 것은 삼한의 민심을 잡는 데 매우 유리한 일이었다.

넷째, 책략과 외교만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킨 ‘모공(毛孔)’이다. 왕건은 금산사에서 탈출한 견훤을 귀순하게 해서 상부(上府)로 모시고(935), 신라의 자존을 살려주며 경순왕이 귀부(歸附)하게 했다(935).

다섯째,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송과 교류’와 고구려 고토회복을 위한 ‘북진정책’이다. 서경(평양)을 중시, 북진정책의 전진 기지로 삼았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서는 선물로 보낸 낙타를 굶겨죽일(만부교 사건) 정도로 단호하게 대했다.

왕건은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유혈을 최소화하면서 발해의 유민까지 포함한 실질적인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삼국사기」 <경순왕별>의 기록이 이를 웅변한다. “옛날 견훤이 왔을 때는 승냥이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오늘 왕공(王公)이 오니 부모를 뵙는 것 같구나.”
ilyo@ilyoseoul.co.kr


우종철논설주간  ily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