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사람 게임처럼 죽이겠다”

게임 중독이 또다시 사회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게임 중독으로 촉발된 강력 범죄들은 물론 인륜을 저버린 사건마저 잇따라 발생하는 등 게임중독의 폐해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는 집에서 게임만 한다고 나무라는 데 불만을 품고 어머니를 둔기로 때려 숨지게 했던 20대 청년이 경찰에 붙잡혔는가 하면 지난 3월에는 온라인 게임에 중독된 부부가 게임 캐릭터를 키우는 데 빠져 생후 3개월 된 딸을 굶겨 죽인 사건도 발생했다. 또 11월에는 게임 중독에 빠진 중학생이 이를 나무라던 어머니를 목 졸라 살해하고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 사회를 경악케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2월 5일 발생한 잠원동 살인 사건은 게임에 중독된 청년의 ‘묻지마 살인’으로 밝혀져 더 이상 게임 중독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논의가 일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게임 중독 문제가 이슈가 된 것은 2010년에만 벌써 네 번째다. 미국 명문대 유학생 출신이 게임 속에서처럼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에 빠져 ‘묻지마 살인’을 벌인 잠원동 참극 속으로 들어가 봤다.

지난 12월 16일 서울서초경찰서에 체포된 박모(23)씨는 경찰조사에서 자신의 범행을 시인하며 고개를 떨궜다. 처음에는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던 박씨는 경찰에 붙잡힌 지 하루가 지나서야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자신의 범행사실을 털어놓았다.


폭력성 게임 심취, 살인 충동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범행 당일에도 칼싸움을 소재로 한 폭력성 컴퓨터 게임에 심취해 밤을 새워가며 게임에 몰두했다. 1대1 격투 게임인 이 컴퓨터 게임에 빠져 있던 박씨는 갑자기 “밖에 나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해 현실에서 모방범죄를 꿈꾼 것이다.

박씨는 가족이 모두 잠들어 있었던 지난 12월 5일 오전 6시30분께 부엌으로 가 몰래 흉기를 챙겼다. 이 흉기를 후드 티 소매에 넣어 감춘 후 살인을 꿈꾸며 집밖으로 나섰다. 박씨가 집 밖으로 나와 채 200m도 채 걷지 않았을 때 김모(26)씨와 한 노인이 지나갔다. 범행대상을 물색하던 박씨는 노인보다는 청년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아파트 입구 근처까지 김씨의 뒤를 쫓아간 박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 느닷없이 소매 속에 감춰뒀던 흉기로 김씨의 오른쪽 등을 깊숙이 찔렀다. 이어 망설임 없이 왼쪽 옆구리를 다시 찔렀다. 영문도 모르고 날벼락을 맞은 김씨는 치명상에도 불구하고 죽을 힘을 다해 도망을 쳤다. 그러나 박씨는 피를 흘리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김씨의 뒤를 쫓아 가며 계속 흉기를 휘둘렀다. 김씨가 대로변으로 도망가자 박씨는 그제서야 뒤쫓기를 포기하고 왔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 아파트 담을 넘어 집으로 돌아갔다.

경찰관계자는 “박씨는 미지의 세계, 낯선 곳에 대한 공포가 있다. 자신이 아는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면 두려움을 느껴, 김씨가 자신이 잘 모르는 대로변을 향해 달리자 추적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했다.

집에 도착한 박씨는 화장실에서 피묻은 흉기를 씻고 부엌에서 닦은 뒤 제자리에 감쪽같이 갖다놓았다. 가족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때문에 가족들 중 누구도 범행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박씨가 휘두른 흉기로 양쪽 폐에 치명상을 입은 김씨는 필사적으로 달린 끝에 이날 오전 6시36분께 잠원동 성당 앞에서 쓰러졌다. 곧 성당 관계자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김씨는 과다출혈로 결국 사망했다.

경찰관계자는 “등에 입은 상처가 치명상으로 김씨의 양쪽 폐 모두 망가져 있었다”고 밝혔다. 치명상에도 불구하고 200m 넘게 달아난 것은 김씨가 극도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음을 짐작케 한다.


조사에서도 게임과 같은 동작

사건 발생 후 경찰은 비상이 걸렸다. 원한관계도 없어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경찰은 범행 장소 주변 폐쇄회로TV(CCTV) 1777개와 6개 노선버스 CCTV를 정밀 분석했다. 분석결과, 성당 앞에서 쓰러져 있는 김씨의 모습은 발견됐으나 범행 장면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범행 장소 부근에 있는 박씨의 모습은 발견할 수 있었지만 범행과 쉽게 연관지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경찰은 CCTV에 찍힌 박씨의 복장이 추운날씨임에도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수상히 여겨 용의선상에 올렸다.

경찰은 박씨가 삭발한 머리를 하고 있고 특정브랜드의 운동화를 신고 있다는 점에 착안, 주변 아파트를 일일이 탐문했다. 경찰은 탐문과정에서 아파트 현관에서 박씨의 운동화를 발견하고 방에서 나오는 삭발 머리의 박씨를 검거했다. 박씨의 집은 김씨의 집에서 불과 7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경찰조사에서 박씨는 흉기를 휘두르는 모습을 재연할 때 컴퓨터 게임과 똑같은 동작을 취했고 범행동기에 대해서도 ‘이유가 없다’고 진술했다. 박씨가 컴퓨터 게임에 얼마나 심각하게 중독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경찰조사 결과 박씨는 서울 서초구의 한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유학길에 오른 박씨는 미국 소재의 한 주립대에 진학했지만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성적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를 비관한 박씨는 3학년까지 다니다 2009년에 중퇴, 서울로 다시 귀국했다.


유학 실패 후 방 안에 틀어박혀

고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공부’에 대한 자신이 있었던 박씨는 유학생활이 실패로 돌아가자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삶의 목표를 잃고 방황했다. 흡연자인 탓에 담배를 사러갈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방 밖에서 나가지 않는 적이 많았다고 한다. 내성적인 성격의 박씨는 하루에 5~6시간씩 게임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친구도 애인도 없이 게임 속으로 완전히 빠져 버린 것이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박씨를 살인혐의로 구속했다. 경찰 관계자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와 컴퓨터 게임 중독에 따른 충동 장애 등이 범행동기로 작용했는지 조사할 예정”이라며 “박씨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면 범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기에 검거하지 못했다면 2차 범행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고 전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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