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한지 한 달이 넘도록 여야가 원 구성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이를 향한 국민적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다. 특히 김선일씨 피랍 사건과 같은 국가적 중대 사건은 무엇보다 국회가 발빠르게 상임위를 통해 대책을 마련했어야 했다는 질타까지 가세하고 있어 국회공전에 따른 책임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총선 때 보여줬던 정치인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지적이다. 막상 원내에 진출한 의원들이 소속 정당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이 때문에 나온다. 국회법은 국회의장단 및 상임위원장 선출 시기를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국회는 국회의장단 구성만 마무리지었을 뿐 의원들의 상임위 배정과 위원장 선출은 아직까지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상임위 구성과 관련해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이 스스로 위법을 저지른 셈이다. 여당은 지난 총선의 승리로 13대 이후 처음으로 여대야소의 정국을 만들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신생아의 모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소수 야당을 설득할 아무런 정치력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또 야당도 과거 수의 정치를 일삼던 당시의 철학은 온데 간데 없고 한 치의 양보도 허용치 않는 태도로 국회 공전에 일조하고 있다. 더불어 한편에서는 김원기 국회의장의 정치력에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즉 여야의 중간에서 양측의 입장을 조율하는 의장의 중재력이 미흡하고 부족하다는 것이다.현재 원구성의 가장 큰 걸림돌은 법사위원장 배분과 예결특위의 일반상임위 전환 문제다. 이에 대해 여당은 책임있는 국정운영을 위해서라도 운영위, 법사위, 국방위, 정보위, 예산 결산 특위 위원장을 가져가야 한다는 입장이며, 예결특위의 일반위 전환문제는 국회개혁 특위에서 논의하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은 여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서라도 법사위는 반드시 야당의 몫이 되어야 하며, 예결특위의 일반위 전환은 총선 공약임과 동시에 여야 회담에서 합의된 내용인 만큼 즉각 수용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무엇보다 두 당의 자리 싸움은 서로가 모두 원칙을 내세워 주장하고 있는 터라 해결의 실마리를 쉽게 찾지 못하고 있다. 특히 상대편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모습은 합의의 시기를 늦출 뿐 국민적 비난만 불러오고 있는 실정이다.한편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상임위를 둘러싼 두 당의 대립 속에 민주노동당과 민주당만 원구성 지연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퍼붓고 있다.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단 대표는 “김씨 피살과 같이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국회는 원 구성조차 하지 못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고 비난했으며, 장전형 민주당 대변인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밥그릇 싸움으로 긴급한 현안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은 국회의 직무유기”라고 성토했다.

따라서 김선일씨 피랍 국정조사, 이라크 추가 파병 반대 결의안 제출 등 민감한 현안에 관해 국회에서는 표면적인 합의만 있었을 뿐 그 외의 경제난, 청년 실업, 주한미군 감축 등에 대해서는 실질적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단지 지난 24·25일 이해찬 총리후보 인사청문특위만 제대로 진행됐을 뿐이다. 그나마 최근 김선일씨 피랍 사건과 관련한 국정조사에 열린우리당 이종걸 수석부대표와 한나라당 남경필 수석부대표가 합의해 원 구성이 조만간 급물살을 탈 수도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왜냐하면 현국정조사법에 따르면 국정의 특정 사안에 대해 해당 상임위 또는 상임위원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조사를 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원 구성이 이뤄지지 않고서는 상임위와 특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므로, 국정조사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원 구성이 우선돼야 한다. 따라서 여야 모두 김선일씨 국정조사에 합의한 만큼 원 구성에도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임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의치 않을 경우 해당 상임위에서 하도록 돼있는 국정조사를 특위 형식으로 운영하기로 해 편법을 쓴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30일 본회의 의결을 통해 우리당과 한나라당에서 내정한 통일외교통상위 의원들로 특위를 꾸릴 방침”이라며 “국정조사가 법의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게 사실”이라 전했다.한편 아직까지 각 당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국정조사 이전 원 구성 합의가 생각처럼 쉽게 이뤄질지는 미지수다.그리고 원 구성이 계속 지연될 경우 민생과 관련된 법안의 통과가 상당한 차질을 빚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으로 ‘고용 창출과 중소기업·서민생활 지원을 위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과 관련해 재경부는 “개정이 늦춰질 경우 중소기업 중 일부는 지원 기준을 맞추고도 법 공포 이후 시행되는 원칙으로 본의 아닌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놓인 법안이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무엇보다 김선일씨 사건으로 외교라인의 강력한 쇄신을 주장하는 등 최근의 여론은 그 어느 때보다 들끓고 있다. 이러한 때에 행정부를 견제해야 하는 입법부가 당리당략에 빠져 아직까지 원 구성조차 합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를 두고 여야 안팎에서도 국회 직무유기라는 비난을 감수하고서까지 상임위 문제를 끌고 갈 필요가 있느냐는 회의론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16대 탄핵태풍 속에서 살아남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개원 초 ‘일하는 국회’, ‘상생의 정치’를 강조하며 출발하던 처음과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여전히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치행태, 불법을 감수하고서라도 당리당략을 지키려는 모습, 민생현안은 뒤로 한 자리짜움 등은 국민의 목숨도 지키지 못하는 초보 외교의 정부와 함께 성토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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