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학연·지연보다는 실력 우선된 인사정책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황희(黃喜, 1363~1452)는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최장수 재상이자 청백리의 전형이다.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해 조선의 번영에 크게 기여했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 시호는 익성이다.

황희는 1363년에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와 호군(護軍) 김우(金祐)의 딸을 부모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1376년(우왕2) 불과 14살 때 음보(蔭補,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게 됨)로 복안궁녹사가 되었다. 21세에 사마시에, 23세에 진사시에, 4년 뒤인 1389년(창왕1)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듬해 성균관학관이 되었다.

관운에 있어서는 우리 역사에 황희 정승을 능가할 인물이 없다. 90세를 살며 59년의 관직 생활 중 24년간 재상을 맡았다. 그 중 18년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을 지냈다. 직함이 재상인 이런 사례는 세계 역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황희는 서른 살이 되는 1392년 고려가 폐망하자 72명의 유신(儒臣)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다. 이후 조정의 요청과 “왕조의 변화와 상관없는 만백성을 위해 나가서 정사(政事)를 잘 하는 것도 의로운 일이다”라는 원로 유신(儒臣)들의 천거로 두문동을 떠나 조선조의 신하가 됐다.

하지만 소신과 원칙을 지키는 강직한 선비 황희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세자 책봉에 관한 문제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에 태종은 11세에 세자로 책봉된 양녕대군을 14년 만에 폐위하고 3남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결심을 굳혔다. 당시 이조판서였던 황희는 ‘폐장입유(廢長立幼,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를 반대하는 직언을 했다. 장자 승계의 원칙과 양녕의 교화가 가능하다는 두 가지 이유가 황희의 명분이었다.

결국 황희는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서인(庶人)으로 교하(交河)에 유배되었고, 곧 남원으로 이배(移配)되었다.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날 때까지 등용되지 못하다가 세종(재위:1418~1450) 4년(1422)에야 유배가 풀려 관직에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때 황희는 이미 예순 살이었다.

이처럼 황희는 자신이 애당초 거부했던 대상인 조선과 세종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황희는 가문·학연·지연보다는 실력을 우선시하는 인사정책을 폈다. 세계최초의 기상관측장비인 측우기를 발명한 부산 동래현 관노(官奴) 출신인 장영실(蔣英實)을 종삼품 대호군(大護軍)이란 높은 벼슬에 오르게 한 것은, 세종과 황희만이 할 수 있는 혁신적 인사였다.

황희는 집현전 출신으로 엘리트의식이 강한 최항·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 신진관료들을 기존 원로대신과 잘 융합시켜, 훈민정음 창제와 같은 세종의 창조경영이 빛나게 했다. 그 밖에 4군6진의 개척, 문물제도의 정비 등을 지휘·감독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

황희의 리더십은 균형과 조정, 상생과 배려,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으로 요약된다. 그는 틀에 얽매이지 않은 유연성과 균형감을 갖고 있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회의 중 가장 많이 했던 말 중 하나로 ‘황희의 뜻대로 하라’는 표현이었다고 전해진다.

황희는 위로는 군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와도 소통이 가능한 재상이었다. 세종은 황희에게 “묘당에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면 경은 곧 ‘시귀(蓍龜, 귀신같이 앞을 내다보는 이)’였고, 정사와 형벌을 논할 때면 ‘권형(權衡, 저울대 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황희는 조선 왕조 최장수 영의정으로서 정치·경제·국방·외교·법률·종교·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전 방위로 활약하며 태종과 세종을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반석을 다졌다. 황희 리더십의 기본은 ‘지족안분(知足安分)’이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만족감을 느끼는 삶, 명예와 권력과 부의 ‘3위 일체’를 스스로 거부하는 삶을 영위한 것이다.

≪문종실록≫은 졸기에서 “조정과 민간이 놀라서 탄식하여 서로 조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서(吏胥, 아전)와 여러 관사(官司)의 복례(僕隷, 노비)들도 모두 전(奠)을 베풀어 제사를 지냈으니, 전고(前古)에 없던 일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전과 노비들까지 영의정의 죽음에 스스로 제사를 지낼 만큼 황희의 인품에 감복하고 그의 관대한 성품을 숭상한 백성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청백리 18인’ 중 으뜸재상으로 황희 정승을 꼽는다. 황희는 ‘청백리’와 ‘청렴’의 표상으로 여겨지지만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만약 황희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총리로 내정되었다면, 그 역시도 시시콜콜한 것까지 신상이 털리면서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낙마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청문회 통과가 인사의 목적이 돼서는 안 되며, 통과 후 국리민복을 위해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를 따져야 된다. 국회 인사청문회제도가 개혁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세종도 “인재가 길에 버려져 있는 것은 나라 다스리는 사람의 수치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조선 세종 땐 인재가 넘쳤다. 명재상 황희·맹사성, 천재 과학자 장영실, 악성(樂聖) 박연, 한글을 만든 성삼문·신숙주, 명장 김종서·최윤덕 등.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독 이 시기만 인재가 많았던 건 아니다. 출신·단점·과거를 불문하고 천하에서 인재를 구한 세종의 ‘인재경영’ 결과다.

온 나라 사람들은 황희를 ‘현재상(賢宰相)·진재상(眞宰相)·청백재상(淸白宰相)’이라 불렀고, 오늘날까지 그를 칭송하고 있다. 세종이 ‘진실로 국가의 주춧돌이며, 자신의 고굉(股肱, 다리와 팔, 온몸)이다’고 한 황희 정승. 그의 90 평생 위국헌신(爲國獻身)한 역동적인 일생을 살펴보며 이 시대의 바람직한 인재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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