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 없는 면피용 사과에 피해자 가족만 운다”

[일요서울|박시은 기자] 옥시레킷벤키저(이하 옥시)가 가습기 살균제 최초 사망자가 나온 지 5년 만에 공식 사과에 나섰지만 ‘면피용’이라는 비판이 거세다. 옥시는 이미 나왔던 내용 대부분을 피해 보상안으로 내놨다. 살균제 유독성 여부에 대해서도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또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나서야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겐 이를 알리지 않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진정성 여부를 의심받고 있다. 이에 옥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유가족들은 “사과를 거부한다”며 영국 본사에 직접 항의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해성 보고서 조작 의혹을 산 서울대학교 교수를 고발해 본격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일요서울]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유가족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심경을 들어봤다.

5년 만에 입장 표명…피해자들에겐 연락 안 해
영국 검찰에 고발·보고서 조작 교수 본격 수사

아타울라시드 사프달 옥시 대표는 지난 2일 기자회견을 열고 “가습기 살균제로 폐 손상을 입은 모든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사과한다”며 “사태 원인을 밝힐 수 있는 철저한 조사와 보상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이날 샤프달 대표는 ▲1, 2등급 피해자 중 옥시 제품을 사용한 피해자를 대상으로 보상안 마련 ▲1, 2등급 외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서 옥시의 인도적 기금 100억 원 사용 등의 계획을 발표했다.

또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전문가 패널을 오는 7월까지 구성하겠다”며 “피해자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최종안은 피해자와 협의해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는 것은 물론, 회사 내부적으로도 자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면서 “만일 잘못된 행위가 확인된다면 즉각적이고 신속한 시정 조치를 취하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옥시를 향한 비판 여론은 여전하다. 현재 옥시가 처한 상황과 사과에 나선 시기가 진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옥시의 공식 사과는 살균제 최초 사망자가 나온 지 5년 만에 나왔다. 그동안 옥시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자에 대한 책임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여 왔다. 또 피해자들의 폐 손상이 ‘황사’ 때문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이 본격화되고, 검찰 수사가 급물살을 탄 상황은 옥시의 사과가 수사 면피용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피해보상안이 구체적인 해결방안 없이 이미 나왔던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검찰 압수수색과 전·현직 임직원들이 고발당하고, 비판여론이 들끓고 있는 상황에서 옥시 임직원 200여 명은 태국 파타야로 포상휴가를 떠났다.

내 손으로 내 아이를…

옥시 기자회견을 지켜본 피해자와 가족들은 “누구를 위한 사과냐”는 질책과 함께 “수사 면피용”이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가족 연대는 “수사 면피용 사과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지난 5년간 피해자들을 외면하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는 이 시점에 이뤄진 기자간담회 형식의 사과를 거부한다”고 말했다.

최승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유가족 연대 대표는 “제 아이는 만 한 살 먹고 입원해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다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며 “5년이나 외면하다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나서야 하는 이런 사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 한번 잘 키워보려고 매일매일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며 내 손으로 우리 아이를 서서히 죽였다. 그런데 옥시는 아직도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태연히 해외 포상 여행을 다녀오는 등 반인륜적 행태를 벌이고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 “옥시는 대한민국에서 자진 철수, 폐업하길 요구한다”며 “반성은 커녕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채 회사법인을 해산하고, 사명을 2번씩이나 변경하는 등 사건을 은폐·축소해온 책임을 지고 우리 사회에서 퇴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진정어린 사과가 필요하다”며 “기자회견조차 기사를 보고 알았다. 우리에겐 연락이 없었다.

옥시는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 납득할 때까지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이어 “정치권에서도 더 이상의 아픔이 없도록 제도적으로 재발방지 대책을 논의해달라”고 요청했다.

또 다른 피해자인 임성준 군 어머니 권미애 씨는 “감기라도 한번 걸리면 중환자실에 가야 하고, 평생 그 흔한 놀이터 한 번 못 가봤다”며 “산소통을 떼고 마음 편하게 친구들이랑 뛰어놀고, 피구를 하고 싶은 게 아이의 소원이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단체인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모임(이하 가피모) 역시 옥시의 입장 표명에 진정성이 없다는 입장이다.

강찬호 가피모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가피모는 옥시의 기자회견 내용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고, 이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 아예 참석하지 않았다”며 “가피모는 연구 조작에 일조한 서울대학교와 호서대학교 교수들을 상대로 윤리위원회를 열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또 가피모는 옥시의 영국 본사인 레킷벤키저를 직접 찾아갔다. 7년 전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5살 난 아들을 잃은 소방관 김덕종 씨는 숨진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옥시 싹싹'을 사용해 아들을 잃었다”며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영국에,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들의 주총 행사장 입장은 거부 당했지만, 이들이 전달한 서한이 주총 의장에 의해 낭독됐다. 또 현장에는 로이터통신과 AP통신 등 외신들도 취재에 나서 한국에서 일어난 가습기 살균제 사태에 관심을 보였다.

가피모가 전달한 서한은 그간의 경과를 설명하는 내용에 이어 ▲ 영국 본사의 공개 사과 ▲ 본사 최고경영자(CEO)가 한국에 와서 직접 사과 ▲ 영국 본사 및 한국지사 이사진 해임 ▲ 완전하고 충분한 보상대책 마련 ▲ 모든 레킷벤키저 제품에 대한 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안전 점검 실시 등 5개 요구사항을 담고 있다.
이와 더불어 가피모는 또 다른 가해 기업인 홈플러스를 소유했던 테스코의 런던 시내 매장 앞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가피모는 영국 검찰에도 레킷벤키저 이사진을 살인죄 등 혐의로 고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또 영국 시민단체가 지원하는 변호인단과 만나 레킷벤키저와 테스코를 상대로 영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는 방안도 논의할 예정이다.

사전모의 정황 포착

한편, 검찰은 옥시의 유해성 실험보고서 조작 의혹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형사2부장)은 지난 4일 오전 서울대학교 수의과대 조모 교수 연구실과 호서대 유모 교수 연구실 등을 압수수색해 실험일지와 개인 다이어리, 연구기록이 담긴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확보했다. 두 교수의 자택도 압수수색 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조 교수가 옥시 수사와 관련된 증거물을 조작한 정황을 포착해, 그를 긴급체포했다. 검찰은 지난 6일 조 교수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조 교수와 유 교수는 옥시 측으로부터 2억 원이 넘는 연구용역비를 받고 ‘가습기 살균제와 폐손상 간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는 등 회사 측에 유리한 보고서를 써준 의혹을 받고 있다. 또 이들은 자문료 명목으로 수천만 원을 개인계좌로 입금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검찰은 “두 교수가 흡입독성실험 전 결과가 유리하게 나오도록 실험 조건을 사전에 모의한 정황을 포착했다”며 “혐의가 확인되면 조 교수는 뇌물수수, 유 교수는 배임수재 혐의가 각각 적용될 수 있다”고 전했다.

seun897@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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