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겨울, 최고의 기대작인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은 오는 17일 무려 70개국에서 동시에 상영을 시작한다.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매트릭스-레볼루션>도 지난달 5일 전세계 50개국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관객을 찾았다. 본격적으로 ‘전세계 동시개봉’전략을 선보인 영화는 올 봄 화제를 모았던 <엑스맨 2>. 장장 93개국에서 일제히 막을 올려 기염을 토한 바 있다. 극성을 부리는 해적판에 시달려온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신 마케팅 툴로 선호하고 있는 ‘전세계 동시개봉’전략이 대규모 이벤트 성격을 띠며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 그 안에서 갖가지 에피소드도 찾아볼 수 있다.

■’왕의 귀환’ 가장 처음 맞는 한국- 첩보전 방불

국내 관객들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완결편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12월 17일 전 세계 70개국에서 동시 개봉되는 이 영화의 할리우드 제작사 뉴라인시네마는 “한국이 ‘왕의 귀환’을 가장 처음 맞게 됐다”는 희보를 전해왔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야제 개봉의 기회를 따낸 것이다.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의 수입사인 태원엔터테인먼트 측은 “오는 16일 국내에서 전야제 개봉을 진행하게 되면서 다른 나라보다 하루 앞서 막을 올릴 수 있게 됐다. 또, 본 개봉일인 다음날에도 시차를 따져보면 (우리나라가) 제작국인 미국보다도 먼저 이 영화를 선보이는 셈이다”라고 전했다. 영화 관계자들은 할리우드가 한국에 전야제 개봉 기회를 준 것에 대해 “아시아권 내에서 한국영화시장을 안정된 규모를 가진 시장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청신호로 볼 수 있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동영상 불법 유포를 막기 위해 마련된 것이 ‘전세계 동시개봉’전략 아니겠는가? 그 첫 스타트를 장식하게 된 것에 대한 부담이 만만치 않다. 첫 개봉국이 된 한국에서는 이미 불법 유출 차단 프로젝트가 가동됐다. 뉴라인시네마 직원 2명이 12월 첫째주 한국을 찾아 철통 보안 체제를 점검해 왔다. 9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펼쳐진 기자시사회의 ‘삼엄함’은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수입사인 태원엔터테인먼트는 뉴라인시네마의 요청에 따라 참석자 명단을 미리 파악, 본사로 보낸 후 일일이 확인 받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다. 시사회 당일, 취재진들은 영화 시작 1시간 30분 전 미리 좌석표를 받아야 했고 카메라는 물론 카메라폰까지 보관대에 맞겨야 했다. 이날 뉴라인시네마 본사 직원을 비롯해 20여명의 경호원들이 동원됐고 이들은 시사회를 앞두고 사전 리허설까지 벌였다고 하니 지금까지는 찾아볼 수 없었던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뉴라인시네마 직원들은 시사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후 행사가 끝나자마자 프린트를 직접 회수해 개봉때까지 보관할 별도의 비밀 장소로 이동시켰다는 후문.

■’제로 아워’ 동참- 새벽까지 영화보고 출근 늦어 곤혹

‘제로 아워’로 명명된 유례에 없는 동시개봉 프로젝트를 선보인 <매트릭스-레볼루션>은 국내에서 11월 5일 밤 11시에 개봉됐다.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과는 전세계 동시 개봉이라는 틀은 같지만 방법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이 각국 날짜 기준으로 17일에 맞춘 것에 반해 <매트릭스-레볼루션>은 전세계에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상영을 시작한다는 것을 기본 룰로 정했다. “매트릭스를 실제로 같은 시간에 경험케 해야겠다”는 이 영화의 감독 워쇼스키 형제의 제안으로 이뤄진 ‘제로아워’ 전략이다. 로스앤젤레스 오전 6시, 뉴욕 오전 9시를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한국과 도쿄는 오후 11시, 런던 오후 2시, 모스크바 오후 5시, 싱가포르·말레이시아·대만·중국 밤 10시, 뉴질랜드는 새벽 2시에 각각 첫 필름을 돌렸다. 11월 5일은 수요일. 직장인이든 학생이든 늦은 밤이나 새벽에 영화를 보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터.

하지만 영화팬들의 관심과 호기심, 그리고 가장 먼저 새 작품을 감상한다는 설렘은 그 부담을 뛰어넘었다. 밤 11시에 첫 선을 보인 한국과 도쿄는 물론, 새벽 2시에 막을 올린 뉴질랜드까지 전세계적으로 첫회 매진 행렬이 이어졌다.국내의 경우 첫 개봉 단 1회 상영에서 전국 6만 5,000명(서울 2만 9,500명)의 관객을 모았다. 좌석 점유율은 95%. 여기에는 ‘수능 특수’도 한 몫했다. 개봉 첫회 영화를 관람한 한 고등학생은 “그날 한 달치 용돈에 해당하는 4만원을 표값, 밥값, 15,000원의 택시비로 다 썼다. 또 다음날은 아프다고 해서 하루종일 양호실에서 잠만 잤다”며 후일담을 인터넷 게시판에 남겼다. 또 다른 네티즌은 “다음날 출근에 대한 부담감도 잊은 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친구들과 <매트릭스-레볼루션>이 나오면 꼭 함께 보자고 했던 약속도 있고 해서. 그런데, 워쇼스키 형제는 11월 5일이 수능시험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교복 입은 수많은 학생들이 영화관을 가득 메웠다.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라며 현장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아침 7시 출근인데 걱정이다”면서도 영화가 끝난 후 새벽 2시에 PC방을 찾아 급히 감상평을 올린 네티즌도 있었다.

“지각했습니다. 눈치 엄청 보이더군요”라며 ‘후유증’을 호소하는 영화팬의 글도 눈에 띈다. <반지의 제왕-왕의 귀환>, <매트릭스-레볼루션>, <엑스맨2> 외에도 올 한해동안 <스파이더맨>, <미녀 삼총사:맥시멈 스피드> 등의 할리우드 영화들이 전세계 동시 개봉 이벤트를 마련했다. 개봉국보다 필름 릴리즈가 늦은 다수 국가에서 인터넷 등을 통해 유포되는 불법 동영상의 피해를 막아보자는 취지.영화 관계자들은 “전세계 동시 개봉이 현재까지는 해적판 방어에 어느 정도 효과를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할리우드의 단골 마케팅 기법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아울러 “관객들이 전세계 인과 동시에 영화를 관람한다는 또 다른 재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 홍보 측면에서도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대형 이벤트로 여겨지는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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