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달 무당을 부르기도

베일 벗은 첩보부대 원조… 증언집 2006년 출간

“KLO의 무기는 총포가 아니라 머리이고 지략이며 빼어난 미래 예측력이어서 그런 무기를 밤낮으로 휴대하고 다닌다. 우리의 탄환은 적이 짐작하지 못하는 위장술과 기상천외의 전술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한 치의 혀이고 글이고 역정보다.

우리의 무대는 시간과 공간이며 여기엔 모든 인간이 등장한다. KLO는 전투조직이 아니라 적과 우리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을 개발하는 지식집단이다. 우리가 무기를 휴대하는 건 오로지 호신(護身)을 위해서이고 또 적에게 체포되지 않기 위해 격투술로 체력을 연마할 뿐이다.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며 이 민족의 번영을 추구한다.”

흔히 ‘켈로’라고 알려진 한국전쟁 무렵 정보수집과 북파공작 전문 첩보부대 ‘KLO’ 대원 출신인 이창건(李昌健.) 씨는 2006년 출간한 증언집 ‘KLO의 한국전 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부 오점을 남기기는 했으나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KLO라는 부대와 부대원들은 존재했다고 자부한다. 한국현대사, 특히 한국전쟁 연구자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이지만,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이 정보부대.

옛 중화민국 정보기관 남의사(藍衣社) 공작원 출신인 염동진(본명 염동연)이 조직한 극우파 테러리스트 단체인 백의사(白衣社)가 전신이라 해서 그들이 남긴 유산 중에서도 악명 높은 그림자만 짙게 부각되던 KLO가 어느 정도 베일을 벗었다.

이창건 씨 증언을 통해 우리 앞에 선 이 첩보부대는 ‘007’과 같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여자 첩보원이 한국전쟁기에 KLO부대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이 이번 증언을 통해 드러나기는 하지만, ‘본드걸’의 느낌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도 ‘로맨스’는 있었으나, 그 무대는 특급호텔이 아니었고, 이가 들끓는 오두막집이나 산중이었다.

그들은 적진에 침투되었다가 무참히 죽기도 했고, 부부를 가장해 적진에 침투된 KLO 공작원끼리 ‘눈이 맞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생각다 못한 지휘부에서는 이런 ‘혼전관계’를 양성화하기 위해 1952년 11월30일에는 공작원 12쌍을 위한 합동결혼식을 마련하기도 했다.

KLO 대원들은 무술실력과 담력을 갖춘 첩보원이긴 했으나, 늘 시달리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달 3회 정도는 무당을 불러 함께 강신(降神)을 경험하는 집단체험도 불사했다.

이씨의 증언에 의하면 KLO는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에 대북 첩보 활동을 위해 미군이 설립한 비밀 정보기관이다. 처음 사무실은 서울 반도호텔 202호실에 마련됐다.

KLO는 정식명칭이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Korean Liaison Office). 창설 당시에는 미군정보팀에서 파견된 미국인 5명과 한국인 6명이 전부였고, 책임자는 미 24군단 공작과장 런치 대위였다. 한국인으로는 최규봉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KLO가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는 한국전쟁기. 1950년 9월 15일. 맥아더에 의한 인천상륙작전을 우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버금가는 전과로 기억하고 있으나 그 성공에는 KLO 부대원들의헌신과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이번 증언집은 ‘증언’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서해만 인천. 이곳을 통해 연합군이 상륙할 수 있는 시기를 선택하는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관은 KLO였고, KLO는 그 임무를 완수했다.

한밤중 연합군을 인천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는데, 최규봉 대장이 이끄는 KLO 대원들은 등대를 확보하고 거기에 성조기를 꽂았다. 이 성조기는 맥아더 사령관이 최규봉 대장에게 선물로 주었다가 나중에 미국의 맥아더기념관에 기증됐다. 인천상륙작전 과정에서 일어난 해프닝도 눈에 띈다. ‘제너럴 맥아더’.

우리에게 익숙한 맥아더는 일본 본토를 함락시키고, 항복한 일본의 군주 히로히토와 함께 나란히 선 사진 속의 맥아더다. 히로히토가 워낙 단신인 까닭도 있지만, 그에 견주어 맥아더가 상당한 거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증언집에 채록된 최규봉 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맥아더는 키가 173-75㎝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인으로서는 단신인 셈이다. 그럼에도 인천에 상륙하는 맥아더는 건장한 미국 군인으로 각인된 사진들만 남아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사진 조작 때문이었다. 이번 증언집에 의하면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할 때 사진기자들을 대동했다. 그런데 맥아더 사령부 홍보팀에서는 맥아더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세를 낮추라고 했다고 한다. 자연 맥아더만 부각될 수밖에.

또한 인천에 맥아더가 상륙하는 장면이 그다지 좋지 않다 해서 사진기자들이 상륙 장면을 한 차례 더 연출해 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었다고 증언집은 전하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KLO 부대 또한 대원이 수천명으로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그 대원 중 일부가 더러 불상사를 일으켰다. 경찰에게 총질을 하다가 붙잡혀 간 일도 있었다고 한다.

증언집에서 나타난 그들의 활동 중에는 세균전과 관련한 기록도 있어 주목을 요한다.

이 증언집에 의하면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은 학계에서 통용되는 일반적 주장과는 다르다. 이 세균전은 악명높은 일본 관동군 731부대장 출신 이시이를 이용해 연합군측이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증언집은 북한 측과 소련군 혹은 중공군을 지목한다. 그 정보 수집을 위해 KLO대원들은 함경도로 침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KLO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1953년 휴전협정과 동시에 버림받았다. 용도 폐기된 것이다. 이창건 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죽기로 싸웠는데도 유엔군도 한국군도 미군도 아니라 하여 군적(軍籍)과 군번이 없고 따라서 군(軍) 경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사망해도 전사자 처리가 안 되고 부상당해도 국군병원 혜택도 못 받고 애초부터 연금 같은 건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경기도 용인의 한국민속촌. 그 창립자가 그토록 자신이 헌신하고자 한 국가와 민족에게 용도폐기된 KLO대장 최규봉이라는 사실을 누가 알까?

KLO는 그 탄생이 시대적 요청이었듯이, 그 폐기 또한 시대적 요청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추앙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들이 있었으며, 그들이 이러한 삶을 살았고, 그것이 지금의 우리에게는 어떤 유산으로 남아 있는지는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

윤광제 작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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