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보험 베끼다가 실수…당국·보험사 서로 ‘으르렁’

▲ <뉴시스>

[일요서울 | 신현호 기자] 올해 보험업계 최대 화두인 ‘자살보험금 지급’ 논란이 결국 해를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대형보험사인 삼성생명과 한화생명, 교보생명을 제외한 나머지 생보사는 모두 미지급된 자살보험금 전액을 지불하기로 했다. ‘빅3’로 통하는 이들 보험사는 최근까지 금융당국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였다. 그러다가 교보생명이 먼저 미지급된 보험금의 일부를 지급하기로 했고, 삼성과 한화도 비슷한 방침을 검토하고 있다.

‘자살보험 상품’이 판매되기 시작한 건 지난 2001년부터다. 보험사들이 재해사망특약에 ‘고의로 자신을 해친 경우에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지만, 가입 2년이 지나 자살하는 경우에는 그러지 아니한다(2010년 4월 이전 판매상품 기준)’는 문구를 반영하면서다.

이런 약관이 만들어진 이유는 보험사가 일본 보험을 오역했기 때문이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당시 보험사들은 일본 보험업계의 약관을 참고했는데, 일반사망보험 약관을 재해사망보험 약관으로 옮기면서 실수를 했다. 이를 다른 보험사들이 베끼면서 확산됐다.

업계에선 이에 대한 논란이 수년간 이어졌다. 논란은 보험사와 금융감독당국과의 송사로 확전됐다. 소송의 쟁점은 ‘약관대로 지급해야 하는가’와 ‘소멸시효’ 두 가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법원 판결이 엇갈리자 논란은 가중됐다. 대법원은 지난 5월 “약관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반면 9월에는 “소멸 시효가 지난 경우는 지급 의무가 없다”며 보험사의 편을 들어줬다.

약관 실수·소멸시효
생보사 “억울하다”

이런 가운데 대다수 중소형 보험사는 미지급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대형보험사들은 지급을 거부했다. 이들 보험사는 그동안 “대법원 판결에 따라 자살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겠지만, ‘소멸시효가 지난 건’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유지해 왔다. 소멸시효는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사실 상태가 일정기간 계속된 경우 그 권리의 소멸을 인정하는 제도다. 보험금 청구권 소멸시효는 2년(2015년 개정 이후 3년)이다.

보험 가입자들은 2014년 자살보험금 지급을 요청했지만 생보사는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재해사망보험금 대신 일반사망보험금만 지급했다. 가입자들은 약관에 기재돼 있는 만큼 보장해줘야 한다며 금감원 등에 민원을 제기했다. 금감원 역시 생보사들에게 보험금 지급을 권고했지만, 회사 측이 법적 대응에 나서면서 지루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5일 알리안츠생명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을 모두 지급하기로 하면서 보험사 사이에서 변화의 기류가 생겼다. 이어 현대라이프생명도 20일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 65억 원을 전액 지급하기로 했다.

현대라이프생명은 “그동안 주주인 대만 푸본생명에 세부 내용을 설명하고 지급을 결정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며 “보험업법과 약관, 대법원 판결문, 사회적 이슈 등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고 밝혔다.

두 회사가 돌연 지급 의사를 밝힌 건 금감원의 제재 통보에 대한 백기투항으로 해석된다. 앞서 금융감독원은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던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 알리안츠생명 등에 대해 현장조사를 거쳐 예정 제재 조치를 통보했다.

통보된 징계 수위는 기관에 대한 영업 일부 정지와 인허가 등록 취소, 최고경영자(CEO) 등 임직원에 대한 해임 권고와 문책 경고 등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전해졌다.

이로써 미지급 보험사는 빅3 생보사인 삼성생명, 한화생명, 교보생명만 남게 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16일 교보생명은 일부 미지급 보험금을 지급하겠다며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이 보험금의 규모는 200억 원 안팎으로, 전체 미지급 자살보험금(1134억 원)의 15~20%에 불과하다.

당시 금융당국 승인
고객 간 형평성 우려

보험사들은 금감원의 강력 조치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사측은 대법원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험사 손을 들어준 데다, 실수로 표기한 약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 생명보험사 관계자는 “당시 이 보험 상품을 승인한 게 금감원”이라면서 “당시엔 문제없다는 듯 승인을 해줘놓고 이제 와서 모든 잘못을 보험사에 떠넘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금융당국 측의 입장은 완고하다. 보험사들이 보험금 지급을 법원 판결 이후로 미뤄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였고 이 때문에 소멸시효가 지나게 된 것이라는 게 금융당국의 입장이다.

보험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 금감원은 이번 자살보험금 사태를 계기로 금융사 제재 매뉴얼 정비를 검토하고 있다. 일단 보험사의 자살보험금 지급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당국으로선 체면치레는 한 셈이지만 이미지 타격은 피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고객 간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남아있다. 앞서 자살보험금 전액 지급을 결정한 보험사들 역시 불만의 소지가 있다.

자살보험금을 둘러싼 최종 징계 수위는 내년 초 열리는 제재심의위원회에서 결정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고객의 신뢰를 얻는 데는 양 측 모두 실패했다는 지적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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