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카터 ‘미군 철수’ 공약에 작전지휘권 환수

F16 도입 추진·북한 무장 선박 승무원 송환은 미국 요구에 따른 것

1978년 외교문서가 30년 만인 2009년 2월 11일 공개됐다. 당시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1만2,000권, 16만 쪽 분량의 각종 문서에는 박정희 정권 말기 한반도를 둘러싼 각종 외교 안보 현안, 사건 사고의 뒷얘기가 담겨 있었다.

특히 1978년 5월 동해에서 발생한 북한 무장선박 격침 사건 생존자 8명 송환 과정에서 미국이 개입했던 부분이나 78년 미 국무부의 한국 인권보고서를 둘러싼 한미 갈등, 주한미군 철수 과정에서 불거진 작전지휘권 환수 문제 등이 눈길을 끌었다.

1978년 외교문서에서는 한국과 미국 정부 간 외교 안보 현안을 둘러싼 입장 조율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북한 무장선박 선원 송환 과정에서는 미국의 송환 입장이 관철됐고, 미 국무부의 인권보고서 발간을 놓고는 한미 갈등이 일기도 했다. 또 77년부터 추진된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된 신경전도 첨예했다.

미묘한 북한 승무원 송환 과정

78년 5월 19일 동해 거진 앞바다에서 북한 무장 선박이 해군에 격침됐다. 국방부는 20일 생포된 북한 승무원 8명을 ‘간첩’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나서면서 상황이 이상해졌다. 6월 1일 미 국무성 한국과 관계자, 2일 스턴 당시 주한 미국대사 대리가 외무부 관계자를 찾아 북한인 조속 송환을 촉구한 것.

면담 요록에 따르면 스턴 대사 대리는 당시 이문용 외무차관을 면담, “미국은 이들이 무해한 침입자(innocent intruder)로 본다”고 말했고, 특히 ▲북한이 9할 이상의 피랍 한국 어부를 석방했고 ▲77년 7월 미군 헬기 승무원을 조기 송환했으며 ▲향후 한국 어부 석방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 등의 근거를 들었다.

이 차관은 이에 “한국은 이들을 이미 간첩으로 발표한 바 있으므로 석방이 그리 용이할 것으로 기대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스턴 대사 대리는 “석방 때 간첩인지, 아닌지 반드시 언급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인도적 견지에서 석방한다고 발표하면 될 것”이라며 훈수를 뒀다. 면담 이후 외무부는 대통령 중앙정보부장 등에게 스턴 대사 대리와의 면담 결과를 보고했고 결국 6월 7일 국방부는 송환 사실을 발표했다.

국방부는 발표문에서 “선박은 북괴 인민무력부 직속 612 전차수리공장 소속 군용선”이라면서도 “잘못을 뉘우치고 가족이 있는 점을 감안해 인도적 배려에서 송환한다”며 미국의 훈수를 따랐다. 북한 승무원들은 13일 판문점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한국 인권보고서 갈등

한국 정부는 78년 1월 미 국무성이 작성한 인권보고서를 입수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 상황에 대해 ▲고문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고 믿기지는 않으나 특별히 간첩으로 신문 받는 때를 포함해 지나친 처사를 배제할 수는 없다 ▲반정부 헌장을 배부한 혐의를 받거나 조직적 학생 데모를 한 사람들은 때때로 구타당하거나 신체적 학대의 위협을 받았다 ▲정치적 성격의 재판에서 판사나 피고인의 변호사나 증인에 대해 행정부가 압력을 가하거나 괴롭히는 일이 있다고 적시했다.

정부는 이에 발끈, 반박 내용을 담은 법무부 의견서를 작성해 미 국무성에 시정을 요구했다. 정부는 우선 보고서에서 미국이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각하 존칭을 사용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고, 고문 문제는 “지나치게 일방적 표현으로, 한국에서는 고문이 없어졌고 간첩 혐의자에게도 고문을 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또 미국 언론이 인권보고서 내용을 보도하자 주미대사관을 통해 적절한 대응 조치 마련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 와중에 주한 미2사단 소속 사병 17명이 77년 7월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비난하는 탄원서를 제출하는 일도 발생했다. 정부는 엄격한 처벌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유감 표시와 경고조치만 하는 바람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주한미군 철수 논란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76년 대선 유세 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했고 그 해 11월 당선됐다. 그는 이후 78년부터 82년까지 주한미군을 전면 철수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정부는 이에 한국군이 미군으로부터 작전지휘권을 환수하는 방안을 고려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76년 11월 작성된 문서에서 외무부는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대책으로 작전지휘권 반환 교섭 착수를 주문했고, 핵우산에 의한 방위 보장 필요성도 강조했다. 또 정부는 구미 및 아주 지역 주요 공관장에게 “주한미군 감군 반대를 위해 주재국 인사들과 은밀히 접촉할 것”을 지시했다.

국방부는 또 미군 철수에 따른 전투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당시 최첨단 전투기인 F16 구매를 추진했고, 77년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미국이 원칙적으로 판매에 동의한 사실도 공개됐다. 하지만 78년 미국 의회의 반대 등으로 계획이 대폭 축소되면서 F16 구매 문제도 자연스레 물밑으로 가라앉아 결국 94년에 가서야 F16이 도입됐다.

데탕트 분위기 맞춰

소련과 관계 개선 시도

1978년 당시 정부는 북한의 대외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또 소련 중공 등 당시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에 대해서도 고심한 흔적이 외교문서 공개로 드러났다.

78년 3월 외무부가 작성한 ‘국제회의에서의 공산국 및 북괴에 대한 활동 지침’에 따르면 북한의 국제기구 가입에 대해 “논의가 되면 반대하지 아니하되 환영 발언은 하지 않는다”고 정했다. 그러나 “북한이 국제기구 가입을 구실로 주재국에 외교 거점 확보를 시도하면 사전 봉쇄토록 노력한다”는 견제 지침도 내렸다.

특히 “공산국 대표가 국제회의석 상에서 아국을 직·간접 비방할 때 대응조치를 취할 것. 다만 회의 분위기 등을 참작, 묵인했을 경우 그 경위 및 사유를 외무장관에게 보고”라는 지침도 눈길을 끈다. 정부는 또 당시 중공의 국제기구 가입 문제는 “자유중국(대만)의 축출을 조건으로 하는 가입안에는 반대하고, 합의에 의한 경우에는 침묵하라”고 입장을 정했고, 소련 등 기타 공산국가의 국제기구 가입에는 기권을 원칙으로 했다.

78년 4월 발생한 대한항공 707 여객기 소련 불시착 사건도 관심을 모은다. KAL 707기는 4월 20일 파리를 출발해 앵커리지로 향하다 소련 영공을 침범해 소련 공군기 공격을 받고 무르만스크 남쪽 얼어붙은 호수에 비상 착륙했다. 이 과정에서 승객 2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기장과 항법사를 제외한 승객 및 승무원이 23일 석방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외교 관계가 없고 북한의 지원 세력이었던 소련에 대해 “깊이 사의를 표한다”는 표현이 담긴 담화를 발표했다. 각국 언론은 “어떤 이유라도 민간 항공기에 총격을 가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이밖에 한국 정부가 미중 수교 등 데탕트 분위기 속에 소련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정황도 확인됐다. 78년 11월 중앙정보부는 “소련에 접근하기 위해 과거의 산발적 공작을 지양하고 대소 영향력이 있는 제3국 주재 한국 공관을 선정, 관련 업무를 전담케 하는 과감한 전술 전환을 시도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북한도 중공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거듭했다. 78년 5월 화궈펑(華國鋒) 당시 중공 공산당 주석은 방북했지만 같은 해 소련 측 초청으로 추진했던 김일성 주석의 소련 방문은 무산되는 등 북한이 대중 관계에 무게를 뒀다는 분석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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