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는 목소리 내지만 선거에서 외면당해
전통적 우파는 재분배 문제 해결에 소극적

유럽의 정치·사회 풍경이 바뀌고 있다. 지난해 6월 국민투표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영국에서 최근 테리사 메이 총리는 ‘하드 브렉시트(EU 단일시장과 관세동맹에서도 남김 없이 깔끔하게 EU와 작별하는 것)’를 선언했다.

여기에 ‘미국 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외치며 등장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에서 새로이 대두하고 있는 정치 세력들에 상당한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현상이 감지되고 있다.

이런 시점에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싱크탱크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의 전략연구소(GEES)가 펴낸 ‘새로운 유럽의 우파’라는 보고서는 유럽의 정치·사회 지형도를 일별하는 데 크게 참고가 된다. 32쪽짜리 이 보고서는 상당 부분에 걸쳐 유럽의 대표적인 비(非)좌파 대중영합주의 정당들을 묘사한다.

보고서의 주요 관찰 대상은 영국독립당(UKIP), 오스트리아자유당(FPA), 프랑스 국민전선(FN),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 헝가리의 청년민주동맹(피데스), 폴란드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 등이다. 보고서는 복잡한 유럽의 정치 지형을 단순하게 설명하기 위해 한쪽 편에 ‘새로운 우파’를, 다른 한쪽 편에 ‘유럽 제도권’을 배치한다.

전자는 하나같이 대중영합주의 전략을 지니지만 그렇다고 전부가 대중영합주의 정당은 아니다. 후자는 국제 관료주의를 통해 통제하고 일하는 경향이 있는 세계화 정당들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힐러리 클린턴 부부가 그들의 지원 세력이 될 가능성이 있는데, 문제는 이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 제도권은 트럼프 정부 안에서도 미약하나마 동정적인 고리를 찾아내려 노력할 것이라고 보고서는 전망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전역에 걸쳐 “트럼프 물결”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유럽 우파 내부의 더 국가통제주의적인 요소들을 약화시킬 수 있다. 오는 5월 치러질 프랑스 대선이 이러한 경향을 증명한다.

이 선거는 중도 우파 제도권을 대변하는 보수주의자·자유시장주의자인 프랑수아 피용 전(前)총리, 그리고 FN의 마린 르펜 당수로 대변되는 국가통제주의 성향의 우파 후보 간 최종 대결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파끼리 각축하는 이러한 프랑스 대선 정국 판세는 좌파의 영향력이 크게 줄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현상은 선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미국의 경우 부시에서 오바마로, 오바마에서 트럼프로 정권이 바뀌면 기업·협회를 비롯한 많은 제도권 조직들에서 홍보 담당자들이 바뀌며 이들 조직이 활용하는 로비스트와 컨설턴트도 정권에 맞게 바뀐다. 협동조합주의가 더 강한 유럽의 경우 이런 변화는 그 폭이 미국보다 커서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조합의 책임자까지 바뀌는 경향이 있다.

유럽에서 우파로의 정치 지형 변화는 미국에서보다 훨씬 큰 승수효과를 갖는다. 보고
서는 그런 변화를 “계산할 수 없는, 거의 절대적인 정통성의 상실”이라고 표현한다. 유럽에서 좌파는 여전히 정치에서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막상 선거가 실시되면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은 유권자들에 의해 기피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보고서가 강조하는 또 다른 초점은 이러한 변화가 “문화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이는 몇몇 유럽 국가들에서 사람들이 전통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공헌을 더 존중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서유럽의 경우 이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가장 뚜렷하다. 중·동부 유럽의 경우, 오직 하나의 대중영합주의를 정치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내세우며 이를 강요하려 들고 심한 경우 그것에 찬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현상까지 벌어지면서 이에 반발하는 시민운동이 생겨날 정도다.

미국 대선에서 로마 가톨릭 신자의 52%, 그리고 여타 기독교 종단에서는 그보다 훨씬 높은 비율의 사람들이 트럼프를 찍었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유세에서 기독교 유권자들을 향해 그들의 교의(敎義) 가운데 일부를 바꿔야 할 것이라고 훈계했는데, 클린턴의 이 발언은 기독교 유권자들에게 정부에 의한 종교 탄압을 심각하게 경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미시건,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트럼프를 찍은 것이 선거 판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보고서는 실업에 대한 태도 변화와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경제구조의 변화도 분석한다. 보고서 저자들은 “돈 몇 푼을 일하고 받건 일하지 않고 받건 마찬가지다. 정상적인 인간을 괴롭히는 후자(後者)에 뭔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은 숫자가 아니며 매우 고귀하다”라는 그릇된 생각을 집중 조명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 좌파는 권위 있는 신문, 커피숍, 토론클럽에서 대담한 생각을 펼치는 독점권을 상실했다. 그들은 또한 갈수록 고립되고 있으며 독백을 많이 한다. 세계시장에서 게임이 진행되는 고르지 못한 방식은 진정한 자유시장 옹호자의 결여를 낳았다는 것도 보고서의 날카로운 관찰이다. 이 게임에서 이기는 사람들 스스로가 그들 명분의 고결함을 믿지 않는다.

자유무역을 예로 들면, “단속하고, 규제하고, 방해하고, 그리고 마침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데에는 상아탑 속에 격리된 수천 명의 관료가 필요하지 않다.” 돈으로써 조작을 일삼는 마법은 런던, 월스트리트, 그리고 여타 금융도시 마법사들의 배를 채워
주었다. 하지만 그런 원(圓) 바깥의 많은 사람들은 어떤 유리함도 감지하지 못한다. 보고서는 고유한 장점이 어떻든 상관없이 재분배적인 국가는 약화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재분배 장치가 정작 의도했던 수혜자들보다 그 장치를 관리하는 관료들에게 오히려 이득을 안겨주는 경향이 있으며, 심지어 수혜자들은 주요한 이득을 누리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유럽의 전통적인 우파 가운데 이 문제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세력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이 사교모임에서 잘 보이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으며 정치적으로 올바른 주장에 직면하기를 겁낸다. 새로운 우파는 그 공백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인 독일에서 엘리트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트럼프에 반대한다.

이 나라에서는 올해 하반기에 총선이 치러진다.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있는 독일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연임에 성공할지 주목되지만 이 나라가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과 정치·경제·국방 등에서 어떻게 보조를 맞춰 나갈지도 향후 유럽의 정치 지형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곽상순 언론인  ily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