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의 기억에서 사라지면서 내부적으로 악전고투
각종 정부 지원이 없어지면서 새로운 세금 속속 등장


고전 비극으로 유명한 나라에서 현대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 서양 문명의 발상지 그리스가 8년이 넘게 이어지는 재정 파탄을 겪으면서 서서히 유럽인은 물론 세계인의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 내부에서는 고통이 더 깊어가고 있다고 외신은 전한다. 이 나라는 이제 그리스 바깥의 사람들에 의해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리스처럼 된다”라는 좋지 않은 본보기로 곧잘 인용될 뿐이다.

2008년 터진 세계 금융 위기에 뒤이어 그리스를 덮친 경제·정치·사회적 낙진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위기 이후 그리스 경제는 거의 3분의 1이나 쪼그라들었으며 이 나라 정부는 외부 지원 없이는 사실상 파산 상태다.

그리스 정부의 빚은 약 3200억 유로(약 400조 원)인데, 이는 이 나라 국내총생산(GDP) 1800억 유로의 2배에 육박한다. 경제적 혹독함은 이제 이 나라 전역에서 체감된다. 실업률은 23%에 달하며 15~24세 인구의 44%가 실업 상태다. 그리스 국민의 20% 이상이 난방 같은 기본적인 생활 편의도 갖추지 못한 채 생활한다.

그리스 비영리기구 ‘다이아네오시스’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 전체 인구 중 극빈층의 비율은 2009년 2%에서 2015년 15%로 늘었다. 그리스가 재정 절벽을 향해 달려가던 2015년 여름, 유럽연합(EU)은 그리스의 곤경이 유럽의 장래를 위태롭게 한다고 경고했다. 이 나라 좌파 정부는 그때부터 여러 달에 걸쳐 그야말로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며 EU와 협상했고 마침내 860억 유로를 추가로 지원받았다. 그것은 5년 안에 세 번째로 제공된 구제금융이었다.

그로부터 1년 반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리스 위기는 유럽인의 기억에서 사라졌고 그 빈 기억의 공간에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파리·브뤼셀 같은 유럽 수도들에서의 테러, 오는 3월과 9월로 각각 예정된 프랑스와 독일의 선거 같은 굵직한 사안들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위기는 지금도 이어진다.

이 나라가 2년 전에 비해 재정적으로 나은 상태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회적 위기는 오히려 더 심화됐다. 이는 구제금융을 받는 데 따른 조건으로 그리스 정부가 긴축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병원, 학교, 사회안전망 등에 대한 지출을 삭감하다 보니 취약 계층 가운데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수가 늘고 있다. EU 입장에서는 그리스 경제가 나아질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며 안도할 수 있다.

그리스는 지난해 두 분기 연속 성장을 달성했으며 올해 2.7% 성장을 이룰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획기적인 전환점은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경제회복이라는 것도 많은 면에서 서류상에 그친다고 지적한다. 빈곤이 증가하고 있으며 실업은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난해 9월 국제통화기금(IMF) 보고서는 “분명 그리스는 현 상황에 도달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며 “하지만 예산의 균형을 맞추고 경상수지 적자를 줄이며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한 두드러진 업적은 사회에 타격을 주었으며 사회의 인내심을 시험했다”고 그리스 사람들이 치러야만 했던 시련을 인정했다.

살림살이가 험악해지자 환멸을 느낀 유권자들의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집권 시리자당(黨)은 2015년 1월 선거 때 긴축에 반대한다는 공약을 내세웠는데, 막상 현실에서는 그 공약을 실천할 수 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시리자당 지지율은 연거푸 떨어지고 있다. 정치적 불안정은 이 나라가 위기를 헤쳐나가는 노력을 번번이 좌절시킨 그리스의 고질적인 문제다.

이것이 지금도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리스가 받기로 약속된 대출의 실행 여부가 현재 불명확한 상태다. 이렇게 된 것은,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긴축을 누그러뜨리려 시도하고 있는 데다, 그리스의 채무 관련 의무를 완화해줄지 여부를 놓고 대출기관들 사이에 이견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 바깥에서 빌리기로 한 돈이 실제 그리스 안으로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 위태위태한 상황이 되자 “그리스 총선을 새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리스에 대한 미래 금융지원을 논의할 대화 채널이 허물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그리스 안팎에서 커지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서 해안의 작은 그리스 마을 ‘에피라’는 호머의 서사시 ‘오딧세이’에 나오며 호머 자신이 이름을 붙인 유서 깊은 곳으로 인구는 300명 이하다. 수천 년 동안 그리스의 마을들은 국가가 어려움에 처할 때면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끈끈한 사회적 결속과 가족간 유대는 강한 농경 전통과 어우러져 위기에 일정 정도의 보호와 자급자족을 보장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런 마을들도 고전하고 있다. 지역 예산을 조금만 삭감해도 당장 에피라 같은 마을을 굴러가게 하는 중요한 서비스가 끊기고 만다. 많은 지역 학교들이 폐쇄됐거나 예산이 깎였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버스 노선이 대폭 줄어 마을들은 자구책으로 택시를 이용해 이동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정부로부터의 지원이 끊기거나 줄어드는 것도 모자라 신종 세금이 잔뜩 생겨나는 바람에 공동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스에서 은퇴자가 받는 연금의 하한은 월 300유로(약 37만원)다. 그런데 이 돈을 가지고 전체 가족이 텃밭에서 기른 작물을 식량으로 삼아 생활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유럽 언론은 전한다.

게다가 사람들이 받는 압박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지난해 연금은 최대 40% 삭감됐다. 그런가 하면 올해 자동차, 전화, TV, 연료, 담배, 커피, 맥주에 새로운 세금이 10억 유로 부과된다. 여기에 공무원 봉급과 연금에서 57억 유로가 깎인다. 전통적으로 세금징수가 느슨하고 사회적 편익이 푸짐했던 그리스라는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 가혹한 현실에 맞닥뜨리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버리고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그 바람에 지난 8년간 그리스의 농촌 인구가 2.5% 줄었다. 젊은이가 속속 빠져나가는 시골 마을에 남겨진 주민들은 심각한 자포자기에 빠져들고 있다. 그리스 여기저기서 ‘트로이카(삼총사)’를 비난하는 소리가 높다고 외신은 전한다. 트로이카는 그리스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대신 긴축 조처를 요구하는 국제기구 3곳으로, EU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 그리고 IMF를 가리킨다.

곽상순 언론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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