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레이디에서 최초 여성대통령과 헌정 사상 첫 탄핵까지

사진=[일요서울 | 정대웅 기자]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 시작
 
대통령 임기 내내 악재에 시달리며 국정 운영 차질

 
[일요서울 | 오유진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5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지난 10일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 됐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주목받고 있다. 대통령의 딸로서 청와대에 입성한 박 전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 피살로 퍼스트레이디 대행으로 활동했고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마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한 뒤 청와대를 떠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이회창 한나라당 대선 후보 지지선언으로 정치행보를 시작했다.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초선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고 정치 행보를 이어가다 18대 대선에 승리하면서 청와대에 재입성했다. 그러나 헌정 사상 첫 대통령직 파면이란 참담한 결말을 맞았다. 일요서울은 박 전 대통령의 어린시절부터 대통령 임기 시절에 직면한 위기들과 탄핵 대통령까지의 굴곡진 일대기를 쫓아가봤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6·25전쟁 중인 1952년 2월 2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육군 소령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교사 출신인 육영수 여사의 2녀 1남 중 장녀였다. 서울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해 1964년 졸업한 뒤 성심여자중학교를 거쳐 성심여자고등학교로 진학 후 졸업했다.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1963년 2월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청와대에 입성했다. 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의 딸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어린 시절을 청와대에서 보낸 뒤 1970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진학했고 1974년 졸업 후 프라스 그르노블 대학교에 입학하며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같은 해 광복절 경축행사장에서 육영수 여사가 피살당하자 귀국했다. 이 사건으로 박 대통령은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서거하면서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생활도 마무리됐다. 박 대통령은 10·26 사건이 발생한 지 약 한 달가량 지나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들어가 18년간 칩거 생활을 했다.
 
당시 27세의 박 전 대통령은 두 동생들과 청와대를 나와 육영재단 운영 외 특별한 직업이나 대외활동 없이 18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최태민 목사와 그의 딸 최순실, 최순실의 남편 정윤회 등 일부 측근들에 의지하며 18년을 보낸 것으로 알려진다. 일각에서는 칩거 기간 동안 박 전 대통령이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는 가치관이 형성됐다고 주장한다.
 
본격적인 정치행보
 
박 전 대통령은 45세인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지원 요청을 받고 이 후보를 공식 지지하며 입당했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은 정치권의 영입 제안을 여러 번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 후보는 대선에서 패배했고 박 전 대통령은 대구 달성 재보선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했다.
 
박 전 대통령은 당이 두 번 연속 정권 창출에 실패한 뒤 2004년 첫 여성 당수가 됐다. 이후 한나라당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서 ‘천막 당사’를 발판 삼아 총선 승리를 이끌며 보수의 구원투수 역할을 해나갔다.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대선 경선에 패했다. 이후 이명박 후보를 도와 정권교체에 기여했지만 이 전 대통령과의 사이는 순탄치 못했다. 이는 당의 공천 탈락에 반발해 뭉친 ‘친박 연대’를 묵인하면서 ‘친박’ 세력이 전면에 나설 기반을 마련했다는 이유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그는 2011년 한나라당의 서울시장 보선 패배 후 다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당을 이끌었고 다시 한번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국정운영 차질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2년 압도적 지지로 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으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개정했다. 이후 2012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득표율 51.7%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꺾고 승리하며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박 전 대통령은 2013년 2월 25일 경제부흥과 국민행복, 문화융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4대 국정기조로 제시하며 5년 임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국민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고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다짐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임기 내내 대내외 악재에 크게 흔들렸고 이를 수습하느라 국정운영에 큰 차질을 빚었다.
 
취임 첫 해부터 박 전 대통령은 인사난맥으로 위기를 맞았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 낙마를 시작으로 김종훈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 김학의 법무부 차관 내정자 등이 박 전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 줄줄이 낙마했다. 특히 미국 순방 도중 벌어진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문 사태가 국제적 큰 화젯거리로 부상하며 박 전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 장관 사퇴와 안대희·문창극 총리 후보자 낙마가 이어져 인사 실패 논란은 계속됐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은 인사수석실을 신설하는 등 청와대의 인사검증시스템을 개선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인사 문제가 계속 지적돼 인사에 골머리를 앓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인사 실패와 더불어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논란도 구설수에 올랐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 2014년 국정원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해킹 프로그램 구입과 민간인 사찰 의혹 등으로 박 대통령은 국론분열과 민심악화를 겪은 것이다. 이는 국정운영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계속되는 위기
 
집권 2년차인 2014년 박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와 비선실세 문건 파동 등으로 또 한 번 국정운영에 위기를 맞았다. 박 대통령은 집권 2년차를 맞아 2014년 2월 25일 취임 1주년 대국민담화를 통해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제시하며 경제살리기 성과 창출에 대한 의지를 내세웠다. 그러나 그해 4월 16일 세월호 침몰사고로 국정운영이 사실상 올스톱 상태에 빠졌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사고 현장을 방문하는 등 수색과정을 챙겼지만 ‘세월호 7시간 의혹’만이 남았다.
 
특히 수습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한 대처와 부조리,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청와대의 태도 등은 국민의 공분을 샀고 결국 박 전 대통령의 국정운영에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박 대통령은 참사 한 달여 만에 대국민담화를 통해 해양경찰청 해체를 선언하고 국가안전시스템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작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두 명의 총리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사고 책임 차원에서 사퇴 의사를 밝혔던 정홍원 전 총리를 유임시키는 등 진통이 계속 이어졌다.
 
최순실의 전 남편 정윤회의 국정개입 의혹이 제기되면서 국정운영의 정상화를 기하던 박 전 대통령은 또다시 위기를 맞았다. 박 전 대통령은 비선 실세 의혹을 ‘지라시’ 수준으로 규정하며 청와대 문건의 유출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당부했다. 하지만 문건 유출과 관련해 수사를 받던 최모 경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황이 발생하며 파장이 확대됐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과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의 갈등이 드러나며 청와대 내부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받으며 국정운영이 순탄치 않았다.
 
국정 동력 상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집권 3년차를 공공·노동·금융·교육 등 4대 구조개혁의 원년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한국 경제 재도약을 위해서는 사회 각 부문의 강력한 개혁이 필수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2015년이 구조개혁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2015년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측근들이 연루되는 등 국정 동력을 상실했다.
 
2015년 4월 자살한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금품 리스트’ 메모가 정권에 악재로 작용했다. 메모에 이완구 전 총리와 전현직 대통령비서실장 등의 이름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도 20%대로 곤두박질쳤다. 당시 일각에서는 ‘조기레임덕’을 우려했다. 파문은 현직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로 연결됐고 이 전 총리는 결국 낙마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의 4·29 재보선 압승으로 국정동력을 회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다.
 
정부는 신종 감염병 앞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국가적 위기대응능력 부재를 드러냈다. 이에 메르스로 인한 사망자와 감염자가 급증하고 국민들의 공포도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해외 관광객들은 한국을 찾지 않았고 내국인들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피했다. 관광업 타격과 소비심리 위축은 실물경기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메르스는 38명의 사망자를 내며 종식됐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국가적 재난대응시스템에 대한 문제점이 드러난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됐다며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공무원연금 개혁이라는 성과를 거두면서 박 대통령이 추진해온 4대 분야 개혁 작업이 탄력을 받는 듯 했다. 당초 계획보다 미흡하다는 등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공무원연금 개혁은 그나마 박근혜 정부 최대 치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정치쟁점화되면서 국론분열을 가져왔다. 노동개혁은 노사정 대타협으로 빛을 보는 듯 했으나 노동계와 야권의 거센 반발로 지지부진했다.
 
이런 가운데 입법에 비협조적이었던 국회와는 대립각을 세웠다. 박 대통령은 구조개혁을 위해 필요한 법안들이 국회에서 발목이 잡히자 국민을 위하는 역할이 아닌 국민의 부담만 키우고 있다며 국회를 향해 비판을 쏟아냈다.
 
집권 4년차에 들어선 지난해 박 전 대통령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하면서 레임덕에 빠지게 됐다. 지난 16대 총선 이후 16년 만에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가 형성되면서 박 전 대통령의 국정 동력도 크게 떨어진 것.
 
불명예 안아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협치(힘을 합쳐 잘 다스려 나간다는 의미)’를 내세웠다. 하지만 사드 배치를 둘러싼 야당과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청문회 개최 요건을 완화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취임 후 두 번째 거부권을 행사하며 국회와의 협치도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일각에서는 지난해 7월 처가의 부동산 매매로부터 시작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둘러싼 각종 의혹이 박 전 대통령을 몰락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박 전 대통령은 우 전 수석의 자진사퇴를 주장하던 야당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우 전 수석을 품고 놓지 않은 점이 큰 요인이다. 박 전 대통령이 우 전 수석을 감싸는 동안 최순실이 현 정부의 비선실세라는 의혹이 점차 불거졌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의 지지율도 하락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24일 국면 회복을 위해 ‘개헌’ 카드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개헌 카드를 제시한 당일 최 씨의 태블릿PC와 관련한 JTBC의 보도가 나오면서 모든 것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JTBC는 2015년 10월 고 최태민 목사의 딸 최순실에게 대통령 연설문과 각종 정부 문건들이 유출됐다는 보도를 시작으로 최 씨의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입시·학사부정, K스포츠·미르재단 설립지원 등을 보도했다. 이는 최순실 게이트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JTBC 보도 다음날 대국민사과에 나서는 등 총 세 차례 대국민담화를 했다. 새 국무총리 후보자에게 전권을 맡기고 자신은 2선으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며 여야가 자신의 진퇴 문제를 합의하면 그에 따르겠다고도 약속했다.
 
하지만 성난 민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2016년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 가결로 박 전 대통령은 직무정지상태를 맞았다. 그로부터 91일 만인 지난 10일 헌재 탄핵심판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으로 물러난 ‘최초의 탄핵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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