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등 IT기술 발달과 불신 풍조 만연한 사회 분위기가 원인

[일요서울|장휘경 기자] 스마트폰 일상화 등 IT기술의 발달과 함께 불신풍조가 만연한 사회분위기의 영향으로 녹취가 성행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이른바 ‘녹취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개인은 물론 기업체와 직장, 학교, 정치판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 불법적인 녹취가 횡행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특히 각종 법적 다툼이 일어나는 재판에서 녹취의 증거효력이 인정되는 사례가 늘면서 불법녹취의 범위는 전방위적으로 번져가고 있다. ‘비밀녹취’는 신뢰가 무너진 사회, 불신풍조가 만들어 낸 오늘날 세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귀띔한다.
 
 
지난 3월 수원지방법원의 한 법정. 방청객이 가득 들어찬 법정 안에 야릇한 대화가 담긴 음성파일이 울렸다. 30대 여성 김모씨가 제기한 이혼소송 관련 재판이 열린 이날 법정에서 흘러나온 음성파일은, 김 씨가 남편의 차량에 설치한 특수녹음기로 남편과 불륜녀의 밀애를 녹취한 것이었다.

김 씨의 행동은 분명히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이었지만 법원은 파일의 증거효력을 인정, 남편의 불륜을 사실이라고 판단해 가정파탄의 책임을 남편에게 돌렸다. 이처럼 최근 불륜을 의심하는 이혼소송 재판에서 녹취파일이나 몰래카메라의 자료 활용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난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최순실 게이트’의 와중에서 헌정 유린과 국정 농단, 각종 불법을 저지른 비선실세들의 행태를 고스란히 보여 준 증거들도 바로 그 녹취파일들이었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대포폰에 녹취된 ‘최순실 녹음파일’은 물론, 고영태 녹취파일과 노승일 K스포츠재단 부장의 녹취파일 등이 공개되면서 온 국민들은 최순실의 국정 농단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구속이라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사회는 그동안 많은 사건과 논란들이 녹취파일 공개로 불거졌다. 1997년 대선 당시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의 대선 자금 관련 대화녹취가 언론을 통해 공개된 지난 2005년의 ‘안기부 X파일사건’을 비롯해 2013년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대리점 갑질 통화 녹취 사건, 2015년 연예인 클라라사건과 이완구 총리 언론 외압 의혹사건 등이 모두 녹취파일로 인해 드러난 사건이었다.

또 2015년 4월,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 전 한 기자와 통화한 내용으로 촉발된 ‘성완종 게이트’ 역시 녹취 공개로 불거진 사건이었다.
 
비밀 녹취
느슨한 법규 문제

 
녹취나 도청에 대해 일반인들이 잘못 이해하는 부분이 있다. 어디까지가 합법이고 불법인지 제대로 아는 이들이 많지 않은 것.

‘통신비밀보호법’상, 타인 간 대화를 제3자가 녹음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녹취내용을 공개해 명예를 훼손하거나 협박의 용도로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대화 당사자끼리는 상대의 동의 없이도 녹음이 가능하다. 녹취와 관련한 각종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대부분의 녹취는 제3자에 의해 ‘비밀녹취’된다는 점에 있다. 제3자가 몰래 녹음한 녹취 내용은 원칙적으로 재판 증거로 사용할 수 없으며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형사 처분까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사례처럼 법정에서조차 증거자료로 활용될 만큼 우리 사회는 ‘비밀녹취’에도 비교적 관대하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녹취에 대한 우리 사회의 법 감정의 문턱이 너무 낮다”며 “현재 스마트폰에 기본적으로 탑재된 녹음기능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풍토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이처럼 불법녹취에 관대한 사회분위기 외에도 누구나 손쉽게 녹취 장비를 구할 수 있는 환경이 비밀 녹취를 부추기는 주 요인으로 작용한다. 포털 등 인터넷검색만으로 ‘몰카’나 ‘특수녹음기’ 같은 녹취 장비를 구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게 현실.

용산전자상가에서 녹음기를 판매하는 상인에 따르면, ‘최순실 게이트’ 이후 소형 녹음기 관련 문의가 두 배가량 늘었고 하루 10대 이상 팔릴 정도로 판매량도 크게 늘었다.

굳이 특수녹음기 등 첨단장비를 이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일상화된 스마트폰에 내장된 ‘통화 중 녹음’ 기능과 자동녹음 애플리케이션의 활용으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과의 통화를 녹취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타 국가들에 비해 유독 불법 녹취에 관대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사기범죄율이 높기 때문.

2013년 세계보건기구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사기범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하루 평균 600건 이상의 사기 사건이 발생해 멕시코, 남아공, 인도, 아르헨티나 같은 사기범죄 상위국들보다 훨씬 많다.
 
녹취 엄격 규제 외국 사례
‘타산지석’ 삼아야

 
이처럼 사기 사건이 많다 보니 의심스러운 상황이 드러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만일을 대비해 녹취를 하는 사례가 많다. 녹취파일이 언젠가 위기 상황에서 나를 지켜줄 무기가 될지 모른다는 인식이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 일종의 ‘피해의식’이 우리사회 전반에 불법녹취가 뿌리내리게 한 셈이다.

이와 같은 이유뿐만 아니라 녹취를 범죄로 인식하고 있는 선진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슨한 법적 규제도 ‘비밀녹취’를 부추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녹취에 대해 관대한 우리나라에 비해 사생활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서구 국가들은 불법 녹취를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특히 유럽 국가들 가운데 녹취에 대해 가장 민감한 프랑스의 경우 상대방 동의 없는 통화 녹음은 물론 녹음한 파일을 소지하고만 있어도 법적 처벌 대상이 된다.

독일과 아일랜드 등의 국가들에서도 상대방 동의 없이 녹음을 하면 처벌받을 수 있고 또 동의를 받더라도 녹음하는 이유를 상대방에게 사전에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특별한 이유나 설명 없이 녹음을 하게 되면 형사 처분의 대상이 될 정도로 엄격하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 비교적 녹취에 관대한 나라가 영국인데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한 법적 제재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영국의 경우도 녹음된 내용을 제3자와 공유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사생활 침해를 막고 있다.

우리 사회에 녹취가 만연해지는 현상에 대해 정태연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녹취가 성행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풍토는 증거를 남기고 싶어 하는 심리가 극대화된 것으로 불신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면서 “약자가 늘 당하기만 하는 ‘갑을 문화’가 대한민국을 녹취공화국으로 만들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와 관련, 비밀 녹취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법 제도의 정비와 더불어 비밀 녹취가 범죄라는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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