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사법부 내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설문조사로 시작된 ‘사법부 블랙리스트’ 사태가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발표에도 불구하고 진정되지 않고 있다.

국제인권법연구회는 전국 법관을 상대로 ‘국제법 관점에서 본 사법 독립과 법관 인사제도에 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지난 3월 25일 열리는 학술대회에서 발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2월 법관 정기인사에서 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 난 이 판사에게 행사를 축소하도록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건이 커졌다.

또 법원행정처 전산국장이 ‘1인 1연구회’ 가입 원칙에 따라 연구회 중복가입을 정리해 달라는 공지도 문제가 됐다. 결국 중복가입자가 많은 인권법연구회를 축소해 활동에 제약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상황이 악화되자 대법원은 진상조사위를 꾸려 조사를 진행했으나 결국 블랙리스트 관련 ‘실체가 없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진상조사위 조사결과보고서에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사실이 담겨 있어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심각한 관료문화 자리 잡은 사법부, ‘법관 독립’ 멀었다
상급심 판결 반하는 판결 시 불이익 받을까 걱정하는 판사들


사건의 발단이 된 국제인권법연구회 설문조사는 전국 판사 501명이 답변했다.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중 96.6%는 ‘법관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개선이 필요한 사법행정 분야가 있다’고 답변했다. 이 중 89%는 ‘인사분야가 개선돼야 한다’고 답했다.

또 45%가 넘는 판사들은 ‘주요 사건에서 상급심 판결에 반하는 판결을 하거나 주요 사건에서 행정부 또는 특정 정치 세력 정책에 반하는 판결을 한 경우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법원장·법원장 등 사법행정권자의 정책에 반하는 의사표시를 한 법관이 보직·평정·사무분담에서 불이익을 받을 우려가 없다’는 설문에 ‘공감한다’는 답변은 11.8%에 불과했다. ‘공감하지 않는다’는 답변이 88.2%로 압도적으로 높았다.

또 ‘소속법원 법원장의 권한을 의식하는 편인지’를 묻는 설문에는 무려 91.8%는 ‘그렇다’'고 응답했다.

어떤 권한을 의식하는지 묻는 설문에서는 ‘근무평정 권한’이 98.3%, ‘사무분담 결정 및 사건배당 관련 권한’이 67.4%, ‘해외연수 선발 의견 개진권’이 66.%로 모두 매우 높게 나타났다.

조사결과가 대부분 사법부 행정체계의 문제, 관료문화의 폐해 등의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내용들이었다.

법원행정처 부당한 압박
‘사법행정권 남용’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는 지난 18일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실체가 없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다만 진상조사위는 사법개혁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한 부당 지시 등 일부 행정권 남용 행위는 존재했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결과 보고서에서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사법부 내 연구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주최하는 공동학술대회 연기와 축소 압박을 가한 점은 적정한 수단과 방법의 정도를 넘어서는 부당행위”라고 결론지었다.

또 조사위는 “이 상임위원이 보고해 실장 회의 등에서 논의된 공동학술대회 관련 대책 중 일부가 실행된 이상 법원행정처도 그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법원행정처가 일선 판사들 연구모임인 전문분야연구회 중복 가입을 제한한 것도 시급성이나 필요성,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조사위는 오히려 “국제인권법연구회나 공동학술대회에 대한 제재로 볼 만한 의심스런 정황이 많다”며 “법원행정처가 예규의 집행이라는 명목으로 국제인권법연구회 또는 공동학술대회를 견제하기 위해 부당한 압박을 가한 제재조치로서 사법행정권 남용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학술대회 축소 등 부당지시를 받았다는 당사자인 이모 판사가 사직 의사를 표시한 것도 이 상임위원의 부당한 지시와 간섭에 따른 점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당사자인 이 판사는 지난 2월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부당한 학술대회 축소 지시 등 압박에 사직의사를 밝혔고 결국 원 소속 법원으로 복귀하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

이와 관련, 이 상임위원은 조사 과정에서 “(전임) 인권법연구회 회장으로서 연구회가 본연의 학술활동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나름대로 노력한 것”이라며 “제2의 우리법연구회로 오해를 받아 불이익이나 피해를 받는 일이 없도록 적극적으로 조언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판사 동향 파일 없다면서
윤리감사관실 소모임 주시?


조사위는 특히 논란이 된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 “이 판사가 이 상임위원으로부터 들었다는 판사들 뒷조사 파일 내용은 여러 정황에 비춰볼 때 국제인권법연구회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이고 이 판사도 그런 취지로 이해했다고 했다”고 전제했다.

하지만 “평소 실장 회의 등에서 인권법연구회 관련 보고 등은 이 상임위원이 맡아서 한 점에 비춰 기획조정실 컴퓨터에 판사들 동향 파악 파일이 따로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고 밝혔다.

조사위는 “이번 의혹 사건을 계기로 법관들의 자율적인 연구모임을 통한 사법제도 관련 논의의 공론화 보장과 이에 대한 보다 공개적이고 투명한 의견수렴 절차 제도화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사실도 있다. 법원행정처는 윤리감사관실을 통해 2015년 7월부터 국제인권법연구회 내 소모임인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이하 인사모)’을 주시해 왔다. 인사모 활동이 법관윤리강령 등에 저촉하는지까지 확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검토 결과 위반사항이 없다는 결론이 나 그대로 뒀다는 얘기다.

인사모에 대한 설립제안은 법원 내부 전산망에 7월 초 처음 나왔다. 본격적인 활동은 8월부터였다. 법원행정처는 처음부터 이 모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윤리감사관실은 법관의 비위 여부를 감찰하는 곳이다. 소모임의 동향을 파악하는 곳이 아니다. 특정 모임 또는 판관을 요주의 인물로 정하지 않았다면 제보나 윗선의 지시가 없는 한 개별적인 수사에 나서지 않는 게 보통이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사법부 블랙리스트’ 사건 원인으로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한 법관들의 줄 세우기 문화에 대한 비판도 나오고 있다. 법관 독립을 최고 가치로 꼽았던 사법부가 심각한 관료문화에 빠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두환 기자  odh@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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