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지난 17일은 ‘강남역 살인사건’ 1주기였다. 지난해 5월 17일 새벽 강남역 주변 화장실을 이용하던 한 20대 여성은 범인의 흉기에 찔린 채 무참히 살해됐다. 이 사건은 ‘여성 혐오’ 논란으로 비화되면서 젠더 이슈로 번져 오랫동안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경찰은 사건 초기부터 이 사건은 여성 혐오 범죄가 아니라 범인의 정신 질환에 따른 범죄라는 입장을 밝혔으나, 지금까지도 ‘여성 혐오 범죄인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여성·시민단체들은 1주기를 맞아 이 사건은 ‘젠더 폭력’이라고 재강조하고 피해자를 추모하면서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 개선을 요구했다.

여성·인권·시민단체, ‘젠더 폭력’ 규정…피해자 추모문화제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차별·성적 대상 경험 터져 나와”


지난해 5월 17일 사건 발생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자를 기리는 내용을 담은 ‘포스트잇’이 쏟아졌다. 당시 한 개인에 대한 이례적인 ‘추모 열풍’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서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여성들의 인식이 깔려 있었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당시 이 사건 초기에는 ‘묻지마 살인’으로 범행의 잔혹성이 부각됐다. 하지만 이후 범인이 여자들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진술과 함께 화장실에서 여성을 고의로 노린 사실이 밝혀지면서 ‘여성 혐오’ 범죄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는 ‘남혐’, ‘여혐’ 등 성별 간 혐오 논쟁으로 비화됐다.

경찰은 가해자의 ‘조현병’에 의한 범행이라고 규정했으나 혐오 논쟁은 계속됐고, 일각에서는 여성이 왜 새벽까지 외부에 있느냐 식의 지적이 나와 혐오 논란을 부채질했다.

다시 등장한 ‘포스트잇’

일 년이 흐른 지난 17일 다시 ‘포스트잇’이 등장했다. 서울·대구·부산 등 전국 주요 도심에서 열린 추모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은 검은 옷을 착용하고 국화와 포스트잇을 준비했다. 당시 포스트잇에 담았던 사회 변화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이어가자는 취지였다. 추모제는 ‘우리의 두려움은 용기가 되어 돌아왔다’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여성·인권·시민사회단체들은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를 추모하고, 이 사건을 ‘젠더 폭력’이라고 규정하며 사회의 만연한 성차별적 인식과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비롯한 전국 56개 여성·시민단체 연대체인 ‘범페미네트워크’는 이번 사건을 통해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열등하게 취급받고, 부당하게 대우받았던 경험들이 터져 나왔다”면서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욕설과 위협을 당하고,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폭력과 착취 피해를 입은 이야기들이 가득 메워졌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경찰과 정부는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 여성혐오에 기인한 범죄가 아님을 주장하는 데 급급했고,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범죄’로 규정하여 가해자를 배태한 성차별적 사회의 책임에 침묵했다”면서 “우리 사회는 지독하게도 ‘여성살해’의 본질을 보려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은 우리의 삶을 바꿔놓았다”며 “우리는 여전히 슬프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살아나가기 두렵지만 여성혐오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저녁 추모문화제가 끝난 뒤 강남역 10번 출구까지 침묵행진을 하고, 젠더 폭력의 경험을 공유하는 발언 대회를 진행하기도 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한국여성민우회는 1주기를 맞아 강남역 사건 이후의 사회 변화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을 물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공식 SNS에 사건 이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라는 주제로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다양한 의견 가운데, 한 누리꾼은 변한 것에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일상 속 차별에 대해 예민하게 보기 시작한 것”이라고 적었고, 변하지 않은 것에 “여전히 페미니즘을 일부 ‘쎈 여자들’의 이슈로만 생각하는 한국 사회와 여성을 여자로 규정하려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다른 누리꾼은 변한 것에 “나만 억울하고 무섭고 예민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아버린 나”라고 적었고, 변하지 않은 것에 “여전히 나를 억울하게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세상”이라고 했다.

강남역 살인 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1년 사이 교보문고에서 팔린 페미니즘 관련 도서는 전년 동기 대비 3.7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페미니즘 도서 구매자의 성별과 연령대를 분석해보면 20대 여성이 41.1%로 가장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또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실시한 투표(총 23만 1104명이 참가)에서 ‘2016 알라딘 올해의 이슈’ 1위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12.01%)이었다.

이런 가운데 1990년대 등장한 ‘영페미’(young feminist·젊은 페미니스트)에서 파생된 ‘영영페미’(‘영페미’보다 더 젊은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이들은 여성 차별과 인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난해 낙태죄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보건복지부에 맞서 ‘검은 시위’를 통해 정부의 행동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한편, 일부 남성들의 ‘여혐’ 문제가 도마에 오르는 것만큼 일부 여성들의 ‘남혐’ 문제도 사회적으로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역사적·사회적으로 약자 취급을 받았던 여성, 특히 가부장적 한국 문화에서 여성의 인권과 차별 문제는 소외돼 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중앙대 이병훈 사회학과 교수는 “(강남역 사건은) 여혐을 포함한 여성 문제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지만 여성을 바라보는 차별적 시각과 정책에 큰 변화가 없다”면서 “여전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시선에서 여성 이슈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각종 여성 정책뿐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인숙 건국대 여성학과 교수는 “인식 변화가 없으면 여성뿐 아니라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 등의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끊이지 않을 것”이라며 “소통과 공감능력을 갖추고 약자를 배려할 수 있는 인식 개선 작업이 시간을 두고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녕찬 기자  kwoness7738@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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