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 생선 못 맡겨’ 법관 100인, “직접 조사할 것”

양승태 대법원장(왼)과 이낙연 국무총리 <뉴시스>
‘사법부 블랙리스트·부당 인사 논란’ 증폭
행정처, 판사 학술대회 축소 ‘외압’ 파장

 
[일요서울 | 권녕찬 기자] 전국의 판사들이 뿔났다. 대법원(법원행정처)이 판사들의 사법 개혁 움직임을 감시하고 저지하려는 의혹이 잇따라 터져서다. 무엇보다 대법원이 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외면하고 사태 수습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판사들이 집단행동에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판사들의 동향과 성향을 분석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폭로가 터진 이후 후폭풍이 이어지는 형국이다. 최근 전국에서 100인의 법관들이 모여 ‘블랙리스트’ 진상 규명과 대법원의 인사 권력 남용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이런 가운데 법원 내부에서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는 모습이다.
 
대법 진상조사위, 자체 조사 했으나 ‘반쪽’ 비판
전국법관대표회의, 결의안 채택 후 대법원 결단 촉구

 
현 사태는 지난 2월 ‘인사 파동’에서 촉발됐다. 대법원은 A판사를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인사발령 냈으나 며칠 뒤 돌연 인사발령을 취소했다. A판사가 고위법관들로부터 3월 열리는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학술 행사를 축소하라는 압력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국제인권법연구회 간사를 맡고 있던 A판사는 이에 반발해 사의를 표명했다.
 
행정처 내 ‘인사 파동’
인권법연구회 ‘눈엣가시’?

 
국제인권법연구회는 2011년 10월 발족한 법관들의 학술 모임으로, 법원 내 가장 규모가 큰 법관 모임이다. 현재 400여 명의 판사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국제인권법연구회는 회장과 간사를 회원 직선제로 선출해 젊은 판사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편으로 알려진다.
 
무엇보다 사법 권력의 독립성과 이를 훼손하는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해 비판하고, 개선 필요성을 주장해온 모임으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사법부 권력 핵심 기관인 법원행정처로부터 감시와 집중 견제를 받아왔다는 것이 법조계 안팎의 얘기다.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는 전국 법원을 관할하는 사법행정 조직으로, 이곳 책임자인 행정처 실·국장들은 법원 내에서 실세 중의 실세로 여겨진다. 전국 법관 2900여 명 가운데 극소수인 35명 안팎의 판사들이 근무하며, 전국 법원의 인사와 예산을 총괄한다. 법원행정처는 판사들의 ‘출세 코스’로 꼽히는 동시에 대법원장과 함께 사법부의 핵심 권력이 집중된 곳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A판사에 대한 외압 의혹과 관련해 당시 국제인권법연구회의의 학술행사 내용은 전국 법관을 상대로 ‘사법 독립과 법관 인사제도에 관한 설문 조사’를 실시·발표하는 것이었다. 대법원장 중심의 관료적인 법원 체제를 개혁해 법관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게 설문 조사의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사법 개혁 목소리를 내는 국제인권법연구회를 법원행정처가 불편해 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법원행정처는 A판사에게 행사 축소를 추진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A판사는 위법한 지시에 응할 수 없다면서 사의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A판사는 본래 근무했던 수도권 법원으로 돌아간 것으로 전해졌다.
 
의혹 부인했으나…
외압 O 리스트는 X

 
법원행정처는 당시 국제인권법연구회를 둘러싼 ‘외압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3월 초 고영한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은 입장문 형태의 글을 내 “행정처는 해당 판사에게 연구회 활동과 관련하여 어떠한 지시를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튿날 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은 이에 반발해 진상규명기구 구성을 청원했고, 대법원은 며칠 뒤 열린 전국 법원장 간담회에서 이 사태의 진상조사를 진행키로 결정했다.
 
3월 중순부터 대법원 진상조사위원회는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같은 달 학술대회에선 “판사 10명 중 9명은 대법원장과 법원장 등에 반하는 의사 표시를 했을 때 불이익을 우려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4월 초 대법원이 판사들의 성향과 동향을 파악한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해 온 정황이 조사위에서 나오면서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졌다. 조사위가 “행정처 기획조정실 김모 심의관(판사) 컴퓨터에 대법원 정책에 비판적인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일종의 사찰 파일이 있고, 그 파일에는 비밀번호가 걸려 있다”는 취지의 진술을 복수의 판사로부터 받았다고 <경향신문>이 보도했다.
 
이후 정치권에서는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제기됐고, 전국 법원 판사회의 대표들은 “진상조사 사안과 관련된 저장 매체 등 모든 자료를 확보하고 면밀하게 조사해 달라”고 촉구했다.
 
4월 중순 조사위는 ‘외압 의혹’과 ‘사법부 블랙리스트’에 대한 진상 조사를 발표, 당시 양형위원회 이모 상임위원이 학술대회를 압박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학술대회 관련 대책을 세우고 일부를 실행한 법원행정처 역시 책임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조사위는 가장 주목됐던 ‘블랙리스트’의 실체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두고 각급 법원 판사들은 컴퓨터 등 물적 조사가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려진 결론이라며 반발했다. ‘반쪽짜리 발표’,‘고양이에 생선을 맡겼다’라는 비판을 제기하면서 추가 조사를 요구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논란이 됐던 ‘블랙리스트’ 조사가 도중에 마무리되자 전국 판사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2008년 신영철 전 대법관의 재판 개입 의혹 사건으로 사법 독립성 침해 논란이 불거진 이후 8년 만의 전국법관대표회의다.
 
자체 조사 방침 ‘천명’
하지만 결의안 통과돼도…

 
이들은 지난 19일 사법연수원에서 10시간여 논의를 거친 끝에 4가지 주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의결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및 사법부 블랙리스트 추가 조사를 위한 권한 위임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실무 담당자들에 대한 인사 조치 ▲대법원장의 명확한 입장 및 문책 계획 표명 ▲법관회의 상설화 및 제도화 주문 등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진상조사위원회 조사 기록 및 자료 제출 ▲법원행정처 전 차장,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이 2016~2017년 사용했던 컴퓨터 등에 대한 적절한 보전 ▲조사 진행을 방해하는 이에 대한 직무 배제 등이 결의됐다.
 
특히 이들은 대법원 진상조사위가 내놓은 결과물이 미흡하다고 판단, ‘현안 조사 소위원회’를 구성해 부장판사 등 5인이 자체 추가 조사를 진행하겠다는 방침이어서 주목된다.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결의안은 지난 21일 법원행정처에 전달됐다.
 
다만 이 결의안이 얼마만큼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다. 결의안 자체가 구속력이 없는 만큼 양승태 대법원장이 모든 안건을 수용하지 않을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결의안 안건 대부분이 결국 양 대법원장을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전망에 무게가 실린다.
 
법관회의 측이 가장 먼저 결의한 추가 조사 요구는 이미 대법원 차원에서 내놓은 결과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에 양 대법원장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또 법원행정처 일부 인사에 대한 인사 조치, 대법원장의 추가 입장 표명, 법관회의 상설화 등이 대법원장의 권한 및 권위를 위협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양 대법원장이 결의안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각급 법원을 대표하는 100인의 판사가 뜻을 모은 만큼, 대법원장 역시 무겁게 받아들일 거라는 것이다.
 
이와 별도로, 결의문이 받아들여져도 조사가 원활하게 이뤄질지에 대해선 부정적인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정렬 전 창원지법 부장판사는 지난 21일 YTN라디오에 출연해, “블랙리스트가 존재했었다는 그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가 모든 파일이 지워져 있는 ‘깡통 PC’라는 이야기가 있다”며 “진상조사위원회가 설치돼도 디지털포렌식(데이터 복구 기술)을 할 수 있는 강제 수사권 자체도 없고, 그 다음에 협조를 한다고 해도 증거가 인멸돼 버렸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법 개혁 불씨 잇따라
양 대법원장 거취 ‘주목’

 
한편 지난 19일 법관 회의에서는 다음달 24일 제2차 전국법관대표회의 개최가 예고됐다. 법관 회의 상설화를 통해 ‘사법 개혁’ 움직임을 이어갈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이런 가운데 지난 5월 말 청와대 법무비서관에 김형연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 임명은 사법부에 대한 청와대의 개혁 의지가 드러났다는 평가다. 개혁 소장파 판사로 분류되는 김 법무비서관은 이번 사태의 시발점이 된 국제인권법연구회의 간사 출신으로, 외압 의혹 등 문제 제기를 사실상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전 부장판사의 청와대 입성으로 오는 9월 퇴임할 예정인 양 대법원장의 후임 대법원장 인선, 내달부터 이뤄질 대법관 인선 등에서도 이전 정부와는 다른 개혁 성향 인사들이 대거 지명될 것으로 보인다.
 
또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위원장 이주영)는 최근 전체회의를 열고 대법원장에게 주어진 인사권을 축소하는 방안이 포함된 개헌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장의 대법관 및 헌법재판관(3인) 임명제청권을 두고 ‘제왕적 권한’이라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양 대법원장이 임기를 시작한 이후 연수원 기수에 따른 ‘서열인사’ 경향이 다시 부활하면서 고위직 판사들이 대법원장의 눈치를 보게 됐다는 비판도 제기된 상태다.
 
법관 회의 이후엔 법원 내부전산망에 양 대법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다수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반대로,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 다수가 법관 회의를 주도했다며 회의의 공정성과 편향성을 문제 삼는 글들도 게시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판사들의 집단 항의로 사법 개혁을 둘러싼 불씨가 커지는 가운데 양 대법원장의 결단과 사법 개혁 향방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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