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뒤 갈수 있다던 미국, 3년 만에 돌아갔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올해는 6·25 전쟁이 발발한 지 67년 되는 해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도 넘었지만 아직까지 전쟁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뜻 깊은 손님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바로 미국 스미스부대 생존 장병들이다. 스미스부대는 유엔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오산시 죽미령에서 첫 전투를 치렀다. 이들 생존 장병 외에도 고인이 된 장병의 후손들도 동행했다. 이들의 한국행은 미래한미재단 이사장 김창준 전 미 연방하원의원, 6·25 관련 행사를 지원하는 글로벌리안 권수인 대표, 국제문화교류재단(ICCF) 양인철 강원지회 지회장의 노력으로 성사됐다.
 
포로생활로 54.5Kg였던 몸무게 28.5Kg로 줄어
죽미령 전투…6시간 전투로 180여명 전사·실종 

 
일요서울은 지난 4일 저녁 밀레니엄서울힐튼 호텔에서 진행된 미래한미재단 주최 스미스부대원 및 가족 만찬 행사장을 찾아 생존자와 가족들을 만났다.

이날 만찬장에는 스미스 부대원이었던 생존자 존굿윈, 도날드테니어와 함께 부대원으로 손가락을 잃은 아버지를 대신해 온 리사숄, 형을 잃은 루이스자모라 등 7명과 김창준 전 미 연방하원의원 외 행사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맥아더 명령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스미스부대는 1950년 7월 5일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함락시키고 남쪽으로 내려오던 북한군과 오산시 죽미령에서 전투를 치렀다. ‘오산 전투’ ‘죽미령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는 유엔군이 한국전쟁에서 치른 첫 전투로 스미스부대가 전투를 이끌었다.

당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6월 30일 미 극동군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같은 날 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 사령관이었던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에 주일 미 제8군 제24사단 21연대 제1대대가 7월 1일 부산에 상륙했다. 당시 부대 대대장이 찰스 스미스 중령이어 스미스부대로 불렸다. 한국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제21연대는 일본 규슈 구마모토 우드기지에서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스미스 중령이 받은 작전 명령은 부산에 도착하면 대전으로 향하고 가능한 부산에서 먼 북쪽에서 적을 지연하고, 북쪽에서 주 도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존 H. 처치 장군을 만나라는 것이었다.

스미스부대는 2개 중대 406명으로 장병 1명이 M1 카빈 실탄 120발과 C-레이션 이틀 분을 갖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한 스미스부대는 오산 죽미령으로 이동했고 7월 5일 비가 내리던 날 오전 전투식량으로 아침을 먹던 부대원들은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을 맞아 혈전을 치렀다.

당시 북한군과의 전투는 6시간 동안 계속됐다. 스미스부대는 총 180여명이 전사·실종되는 피해를 입으며 전투에서 패했다. 하지만 스미스부대가 북한군의 남진을 지연시켜 국군과 유엔군 낙동강 교두보를 지켜낼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줬다.

당시 죽미령전투에서 스미스부대원들이 북한에 패배한 원인은 북한군을 얕잡아 본 맥아더의 오판 때문이었다. 미 2개 사단만 보내면 북한군을 무릎 꿇릴 수 있을 거라 자신했지만 죽미령에서 만난 북한군의 전력은 예상 외로 강했던 것이다.
 
생일 하루 전 잡혀
북에서 포로생활 3년

 
만찬장에서는 7월 5일 죽미령전투에 참가했던 두 명의 생존자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존굿윈과 도날드테니어다.

그중 존의 사연은 기구하다. 그는 19세에 군에 입대해 일본에 배치됐다. 이후 맥아더의 명령으로 부대원들과 함께 7월 1일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5일 후, 첫 전투 다음 날인 7월 6일 북한군에 의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한국에 온 지 5일 만이었다.

존은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회상했다. 그가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힌 7월 6일은 자신의 생일 하루 전날이었다. 그는 그렇게 북한군의 포로가 돼 3번의 생일을 북한에서 보냈다.

존이 한국으로 올 때만 해도 “(한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며 “2주 후면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는 3년이 지난 1953년 8월 풀려났고 9월에서야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당시 포로 생활에 대해 묻자 존은 “(몸무게가) 120파운드에서 63파운드로 확 줄었다”며 “(같이 간 포로들) 대다수가 죽었다”고 말했다. 또 “평양에 3주 정도 있었는데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광경도 많이 봤다”고 전했다.

그는 수용소 생활에 대해서 “제대로 음식도 먹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에 있는 사람이 죽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며 “일반 군인들도 먹을 게 없었는데 우리한테 주겠냐.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고 말했다.

존은 전쟁과 포로 생활을 거치며 오른쪽 눈의 시력을 많이 잃었다. 오른쪽 팔도 다쳐 미국에서는 장애인으로 등록돼 우체국에서 근무했다. 퇴직한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생선가게를 운영한다.

전쟁 당시와 지금의 우리나라 모습을 비교해 달라고 하자 그는 “(지금의 한국은) 미국의 뉴욕하고 비교해도 다르지 않을 정도”라며 뿌듯해 했다.

올해로 87세인 존은 2~3년 전부터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오산시가 매년 7월 여는 ‘유엔군 초전기념 및 스미스부대 전몰장병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존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리사의 아버지도 스미스부대원이었다. 그녀는 아버지는 전쟁에서 한쪽 손가락 다섯 개를 모두 잃는 부상을 당했다. 리사는 미국에서 부대원들의 월급명세서 등 스미스부대원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해 왔다.

한편 오산시는 죽미령 인근 외삼미동 600의 1번지 일원 4만9000㎡에 스미스기념공원, 유엔테마문화관, 병영체험캠프 등 역사체험장과 교육관광시설을 갖춘 평화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시는 2015년 11월 죽미령 유엔초전기념 평화공원사업 전담팀을 구성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안민석 의원은 같은 해 6월 국회 임시회에서 평화공원 조성 촉구 결의안을 대표 발의했었다. 이미 착공한 공원조성사업은 2019년 완공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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