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도주 우려 긴급체포 순간까지 피의자와 통화
징역 25년 선고, “불특정 대상 범행해 국민 충격과 공포…사회 격리해야”


지난해 여름 인적도 폐쇄회로(CC)TV도 없는 의정부 사패산 기슭에서 한 여성 등산객이 숨진 채 발견됐다. 경기 의정부경찰서는 지난해 6월 11일 의정부 사패산 살인사건 피의자가 범행 후 하산(下山)하는 모습이 담긴 폐쇄회로(CC)TV 녹화영상을 공개했다.

50대 여성 등산객이 숨진 채 발견된 지 사흘째인 10일 밤. 폐쇄회로 분석과 DNA 대조에서 딱히 명확한 단서가 나오지 않아 형사들의 마음이 타들어 가던 오후 10시 55분께 의정부경찰서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에선 한 남성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내가 사패산 살인사건 범인이다”라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당시 의정부경찰서 한근중 강력4팀장은 경찰 생활 수십 년의 경험으로 장난전화가 아닌 피의자의 자수임을 직감했다.

정모(46)씨는 술을 마신 상태에서 자신이 이번 사건을 저질렀으며 현재 강원도 원주시내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8일 오전 7시 10분께 사패산 8부능선에서 55세 여성 등산객이 옷이 반쯤 벗겨진 상태로 숨진 채 발견돼 지역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든 사건의 피의자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한 팀장이 수화기 너머의 정 씨와 통화를 이어가는 사이, 형사 5명으로 구성된 1개 강력팀이 원주시로 급파됐다. 의정부경찰서에서 정 씨가 있는 곳까지는 빨리 가도 1시간 30분은 걸리는 거리. 그 사이 정 씨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도주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곧바로 기지가 발휘됐다. 형사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통화를 계속하기로 한 것.

한 팀장은 중간중간 끊었다가 통화를 다시 하기를 반복, 정 씨를 안정시켰다. 용의자의 심리를 아우르고 달래주면서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겉으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속은 긴박하기 그지없는 범죄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형사들이 원주시내 한 길가에 도착한 시각은 날이 바뀐 11일 오전 0시 33분.

이곳에 연고가 없는 정 씨는 그때까지 자수 의사를 밝히는 통화를 하며 바람을 쐬고 있었고 경찰은 정씨를 살인 혐의로 긴급체포했다. 이어 정 씨를 경찰서로 긴급 호송해 정 씨가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자백을 받고, 피해자 몸에 남아 있던 신발 발자국과 정 씨의 것이 일치한다는 경기북부경찰청 과학수사계 의견을 토대로 정 씨를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했다.

이 모든 과정이 토요일 해가 뜨기 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경찰은 술을 마신 상태에서 한밤중 1차 조사로 지친 정 씨를 우선 의정부경찰서 유치장에 입감했다. 범행 동기와 사건 경위를 집중적으로 추궁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정 씨는 경찰에 “혼자 있는 여성을 보고 돈을 빼앗으려다 폭행했고 결국 숨지게 했다”고 자백했다. 정 씨는 피해자와 모르는 사이로 확인됐다. 정 씨는 의정부 지역 사람도 아니며 살인사건 보도를 접하고 원주로 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에서 피해자의 지갑이 사라져 강도살인사건이 아니냐는 의심과 옷이 벗겨져 있다는 사실에 성폭행 시도 의혹도 제기됐다. 재판에 넘겨진 정씨는 피해자를 죽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사망할지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돗자리가 미끄러워 피해자의 목 밑에 깔린 자신의 팔을 빼는 과정에서 여성이 숨진 것이지 자신이 일부러 죽인 게 아니라는 황당한 주장을 폈다.

그러나 1심 법원인 의정부지법 형사합의12부(허경호 부장판사)는 정씨의 반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부검 결과 정 씨가 피해자의 목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압박한 것으로 추정돼 피해자가 사망할 가능성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사인은 두부(머리) 손상 후 목 졸림에 의한 질식사로 밝혀졌다. 재판부는 “부검 결과 점출혈(실핏줄이 터져 생긴 출혈)이 나타났는데, 이는 질식상태가 상당 기간 지속됐다는 걸 의미한다”며 “눈꺼풀에 나타난 점출혈은 압박의 시간이 길었다는 걸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정 씨가 피해자의 목을 조른 시간이 짧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으로 미뤄 사망할 가능성을 인식하고서도 범행한 ‘미필적 살인의 고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와 함께 시신에 남겨진 여러 흔적 역시 정 씨의 살인죄를 증명했다.

법원은 정 씨에게 징역 25년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강의 수강을 명령했다. 또 정 씨에 대한 정보를 10년간 공개·고지하도록 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극도의 고통과 공포감을 주고 유족에게도 평생 치유하기 어려운 정신적 고통을 줬다”며 “불특정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아 일반 국민에게까지 충격과 공포를 줬다”고 밝혔다.

또 “그럼에도 유족에게 용서받기 위한 어떤 노력도 보이지 않았다”면서 “상당 기간 사회와 격리하고 엄중한 책임을 물을 이유가 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범행을 계획한 것은 아닌 점과 우발적 살인이며 범행 이후 자수한 점 등을 참작했다”고 덧붙였다.

사패산 살인사건은 수락산에서 발생한 강도살인 사건과 여러 면에서 닮았다. 앞서 수락산 사건의 피의자 김학봉(62)씨는 돈을 빼앗으려 살해했다고 자백했고 정 씨 역시 일단 살해 동기가 돈 때문이라고 했다. 생면부지의 나홀로 여성 등산객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피의자가 범행을 저지른 뒤 자수한 사실까지, 두 사건은 아예 판박이에 가까워 보인다.

윤광제 작가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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