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웅 기자> photo@ilyoseoul.co.kr
- 작년 국회 8,621건의 법률안 중 1,445건만 처리
- 정기국회 개회사 대통령제 아래 국회 역할 강조

 
 지난 9월 1일 제354회 정기국회가 개회하였다. ‘나라다운 나라’를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첫 번째 맞이하는 정기국회인 것이다.

작년 10월 이후 현 정부가 출범하기까지 실질적으로 국정을 이끌어 온 것은 정부가 아닌 국회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의 정기국회 개회사에 쏠린 관심은 여느 때와는 다른 것이었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달변가다. 그의 연설은 부드럽지만 힘이 있다. 대중적인 호소력이 부족할지 몰라도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언제나 노트가 부족할 정도다. 기승전결의 구조에서도 박사학위 논문 한 편과 견줄 정도의 완결성이 있다. 그래서 그의 정기국회 개회사 연설은 다시 한 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현재의 한국 정치를 정확히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지면을 빌려 정세균 국회의장의 제354회 정기국회 개회사에 숨어 있는 속뜻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먼저 코스요리의 애피타이저(appetizer)에 해당하는 도입 부분이다. 정기국회 개회 직전의 우리나라를 둘러싼 상황은 불안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불안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경기 침체와 고용 악화에 따른 생계 불안은 금세기 내내 지속되고 있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살충제 계란파동으로 시작된 먹거리 불안은 그 자체로도 국민건강을 해치고 있지만, 계란 없는 식탁은 우리들의 식욕마저 저하시키고 있다. 생리대 유해성 논란으로 확산된 화학 물질에 대한 불안은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도 북한의 핵실험과 탄도 미사일 발사 앞에서는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모든 이슈를 한숨에 집어삼키는 것이 북한과 관련된 이슈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이고, 통일과 평화라는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 일깨워 주는 데는 북한의 역할이 그 어떤 주체보다도 크다는 것을 새삼 깨우쳐 준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이러한 만연된 국민 불안을 해소해야 할 주체로서 ‘국민에게 힘이 되는 국회’를 기치로 내건 20대 국회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번 정기국회도 국민 불안을 해소하고 그러한 국민 불안을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우선적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주체는 국회보다는 정부가 앞장서서 해야 할 것임은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 구조에서 기(起)에 해당하는 부분은 지난 20대 국회 1년의 성과를 돌아보고 이번 정기국회에 임하는 동료 국회의원들에게 생산적인 국회가 될 수 있도록 당부하는 연설이었다.

지난 1년 동안 20대 국회는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 청소근로자 직접 고용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를 이루었는데, 그런 점에 대해서 약간의 자화자찬성 이야기로 긴장을 푼 뒤, 행정부에 대한 감시와 견제라는 측면에서 그 어떤 도구보다도 강력한 국정감사 제도를 개선하여 협치 풍토를 조성한 점을 강조하였다.

또한 88년 이후의 여소야대와 4당 체제에서 국회의장과 4당 원내대표 회동을 정례화함으로써 국회가 실질적인 정치의 무대가 되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지난 10월 이후의 대통령 탄핵소추와 파면, 그리고 그 이후의 국정관리, 새로운 정부 출범이후의 추경예산 편성과 정부조직 개편, 인사청문회 등을 거치면서 국회의 위상을 재정립한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칭찬해줄 만하다.

그렇지만 국민적인 관점에서 보면 20대 국회를 마냥 칭찬해줄 수만 없다. 지난 1년 동안 국회에는 8,621건의 법률안이 제출되었지만 처리된 법률안은 1,445건에 불과하며, 아직도 7,102건이 계류 중이다. 법률안을 많이 처리하는 것이 일하는 국회와 등치될 수는 없지만, 입법 기관을 감시하는 단체에서는 그 점도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에 국회의장으로서는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신 정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각 당이 공통으로 공약한 법안에 대해서는 빠르게 입법화를 추진하도록 요청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강조하지 않아도 20대 국회 들어오면서 각 당에서 앞 다투어 사용하고 있는 새로운 정치용어가 협치(協治)라는 개념이다. 협치라는 용어는 서양에서 거버넌스(governance)가 활성화되면서 이를 번역한 21세기 신조어다.

원래 지난 세기 말 일본에서 거버넌스가 협치, 공치(共治), 공치(公治)라는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이 용어가 우리나라에서는 협치로 일원화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협치를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했다. 100% 공감할 수 있는 협치에 대한 정의이다. 내 식으로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협치는 사랑과 같은 것이다.

사랑하는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당연히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여야당, 그리고 청와대에서 이야기하는 협치가 사랑은 아닌 것 같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인 것이다. 2012년 5월 25일 협치의 제도화 차원에서 개정된 국회법, 일명 국회선진화법은 국회 내에서의 물리적 충돌을 방지하고, 다수당의 일방적 국회 운영의 횡포를 방지하는 데는 상당히 유용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정권의 거수기로 전락한 여당과 입법과 예산을 정치 투쟁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던 야당에게 총칼 대신에 말하고 대화할 수 있는 권리를 찾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회선진화법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기에는 여러 가지 장벽이 높은 것 같다. 우선 다수결 원리를 훼손하는 안건조정제도는 국회의원 3/5, 즉 180명 이상의 찬성을 필요로 한다.

예산안 자동부의제도도 법정기한인 12월 2일에 다음  연도 예산안을 처리할 수는 있지만 여야당 간의 합의 없이도 처리할 수 있다는 핸디캡을 갖게 되었다. 또한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이 강화되어 국회의장이 정치력을 발휘하는  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국회선진화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작년 총선 때는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이 내심 180석을 기대했던 것이며, 현재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야당이었던 때와는 입장을 달리하여 국회선진화법을 개정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하는데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가 문제였는데 정세균 국회의장이 스스로 개회사를 통해 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국회선진화법의 근본 취지를 유지하는 가운데, 국회운영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제고하는 방안으로 국회법을 개정하는 데 여야당이 나서 달라는 것이 그것이다.

더구나 개정된 국회법의 시행은 현역 국회의원, 정당의 이해관계를 초월할 수 있는 21대 국회에서 시행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절묘한 신의 한 수임이 분명한데 각 당이 국회의장이 깔아 놓은 멍석에서 어떻게 놀지는 두고 볼 일이다. 승(承)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정치현안인 개헌, 북핵 및 미사일 문제에 대한 언급은 전(轉)에 해당하고, 클라이막스(climax)로 치닫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이낙연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 여러분! -중략- 새 정부가 국정 운영에 속도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와의 긴밀한 소통 속에서 민주적 절차와 정책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일에 결코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어떤 국회의장도 정기국회 개회사에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을 호명하면서 정부에 대해 질책성 고언을 한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의 2017년도 정기국회 개회사는 대통령제 하에서의 3권분립, 그리고 국회의 역할에 대해서 핵심을 짚은 명연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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