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법리 공방→정치 쟁점화 장외전

[일요서울ㅣ고정현 기자]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 보복”, “믿고 지지해 주는 분들이 있어 포기하지 않겠다”. 6개월간 침묵했던 박 전 대통령이 지난 16일 사실상의 ‘재판 보이콧’을 선언함과 동시에 보수층에 ‘옥중 메시지’를 보냈다. 한때 ‘선거의 여왕’으로 불리던 박 전 대통령이 법리 싸움에서 승산이 보이지 않자 전면적인 정치 투쟁으로 승부수를 던졌다는 관측이다. 일단 박 전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자신과 보수 야당 사이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성과를 냈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움직임에 맞서는 보수 야당의 ‘정치 보복’ 프레임에 자신을 집어넣었다는 평가다. 여기에 의도했든 안 했든 최근 CNN의 ‘인권 침해’ 보도는 자신에게 우호적인 국제 여론이 형성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보수 대통합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고, 지방선거가 8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다. 박 전 대통령의 ‘옥중 투쟁’이 단기·중장기에 걸쳐 정치권에 상당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 자명해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의 ‘옥중 정치’, 그 내막을 심층 취재했다.
 

- 보수 결집·국제 여론 형성... “文 정부 정치적 부담 상당할 것...”
- ‘박근혜의 역설’... “발언할수록 불리해지는 쪽은 보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 18일 자신이 수감 중인 서울구치소에 “19일 재판에 나가지 않겠다”는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했다. 지난 16일 “재판부에 대한 믿음이 더는 의미가 없다”며 사실상 재판 보이콧 선언을 했던 박 전 대통령이 실제로 재판 출석을 거부한 것이다.

사건 기록만 10만 쪽 넘어…
커지는 ‘궐석재판’ 가능성


자신의 변호인단이 전원 사임한 상황에서 이제 박 전 대통령의 선택지는 세 가지다. 사선 변호인을 선임하거나 국선 변호인의 변론을 받는 것, 그리고 ‘궐석 재판’이다. 그러나 이미 사법부의 재판을 ‘정치 보복’으로 규정한 박 전 대통령이 새로운 변호인을 선임할 가능성은 낮다. 박 전 대통령 측 관계자 역시 “변호인단이 사임 의사를 재고하거나 다른 사선 변호인이 선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이 경우 재판부는 국선 변호사를 직권으로 선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박 전 대통령이 국선 변호사의 변론 활동에 협조할지는 미지수다. 더욱이 새로 선임된 국선 변호사는 당장 10만 쪽에 달하는 방대한 수사 기록과 그동안의 재판 진행 내역을 파악해야 하기에 가능성은 희박하다.

남은 선택지는 ‘궐석 재판’이다. 이미 박 전 대통령은 “재판은 재판부의 뜻에 맡기겠다”, “이 사건의 역사적 멍에는 제가 지고 갈 테니 모든 책임은 저에게 물어 달라”는 말까지 한 상태다. 변호사 선임은커녕 향후 재판 출석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박 전 대통령의 선택이 ‘궐석 재판’이 될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궐석 재판이란 피고인이 출정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피고인의 출석 없이 재판을 하는 제도다. 물론 박 전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할지 아직까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세 가지 선택지 모두 박 전 대통령 자신의 ‘미결 구금기간’만 늘어날 뿐이고 설상가상으로 변호인도 피고인도 없는 궐석재판이 진행될 경우 재판은 당연히 피고인에 불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모를 리 없는 박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정치권은 박 전 대통령이 정상적인 법리 싸움에서 승산이 보이지 않자 자신의 재판을 정치 쟁점화해 ‘판 흔들기’를 시도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자유한국당이 자신의 출당을 저울질하고 있고, 국정농단 핵심 피고인들이 줄지어 유죄를 선고받고 있는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이 친박 세력과 보수층의 결집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결백도 재차 강조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매한가지인 만큼 국면을 어떻게든 뒤흔들 적시라는 판단도 짚이는 대목이다.

친박계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어차피 인민재판인데 뭐 하러 고분고분 재판을 받느냐”며 “박 전 대통령이 ‘모든 것은 다 내 책임이다. 다른 사람은 못살게 굴지 말라’고 선언하고 정치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의견이 표출되는 상황이었다.

일단 박 전 대통령의 벼랑 끝 전술은 보수 야당과 자신을 공동 전선으로 한데 묶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특히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이 보수 야당이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움직임에 ‘정치 보복’ 프레임으로 맞대응하고 있는 국감 기간 중 나왔기에 그 효과가 배가 됐다는 평가다.

벼랑 끝 전술의 노림수,
보수 단체 집회 ‘부활’


어차피 재판 과정에서 불리한 정황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선 법리 투쟁보단 재판의 불공정성을 최대한 부각해 보수 세력의 결집을 기도하고 이를 바탕으로 판을 크게 뒤흔드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박 전 대통령 재판의 본질이 법리적 양상을 벗어나 진영 논리로 옮겨붙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관측이다. 

실제로 박 전 대통령의 발언 직후 보수 단체들의 집회가 부활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연장을 기회로 보수단체들의 규탄 집회와 석방 촉구 집회 등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14일 대학로 일대에서 열린 집회에는 류여해 자유한국당 최고위원과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 등의 모습이 포착됐다.

조원진 의원이 공동대표로 있는 대한애국당은 박 전 대통령 석방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박 전 대통령 재판이 진영 논리로 비화될 조짐이 일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정치권 일각에서는 ‘친박연대2’가 등장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포착된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지난 17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심각한 인권 침해를 당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제출될 예정이라는 미국 CNN의 보도도 무시할 수 없다.

CNN에 따르면 MH그룹이 OHCHR에 제출할 예정인 ‘인권 상황에 대한 보고서’ “박 전 대통령이 더럽고 차가운 감방에 갇혀 있으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도록 계속 불을 켜놓고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는 국제 여론이 박 전 대통령에 옹호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 대통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이는 얼마 전 박지원 국민의당 전 대표가 “문 대통령의 고민이 상당히 쌓이리라 본다”고 한 발언과 어느 정도 궤를 같이한다.

박 전 대표는 지난 17일 오전 ‘신율의 출발 새 아침’에 출연해 “박 전 대통령이 선고를 받아 형이 확정된다고 하면 그 부담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상당히 올 것”이라며 “전직 대통령을 언제까지 옥중 생활을 하게 하느냐와 그 지지 세력의 요구 등 때문에 문 대통령의 고민이 상당히 쌓이리라 본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정치권은 보수층의 결집이 현실화되고 국제 여론도 박 전 대통령에 옹호적으로 형성된다면 변호인단 없이 재판을 받는 박 전 대통령에 재판부 역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이 사실상 재판을 포기해 형량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재판부가 부담을 느껴 반대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며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선 형량이 높아져도 항소심이 있기 때문에 상관이 없고, 보수 지지층이 결집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박 전 대통령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기존 지지층의 결집 수준,
보수층 동정론 일지 않을 것…


반면 일각에서는 이번 박 전 대통령의 폭탄 발언을 ‘박근혜의 역설’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박 전 대통령이 정치적 발언을 하면 할수록 보수야당이 훨씬 불리해진다는 것이다.

보수 야당이 방법의 차이일 뿐 어떻게든 박근혜 정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 지금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역효과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박 전 대통령의 ‘옥중 메시지’가 기존의 박 전 대통령 열혈 지지자층의 결집 수준에서 그칠 뿐 보수층 전반에 동정론이 일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설사 박 전 대통령의 ‘옥중 정치’가 보수 지지층이 결집을 어느 정도 이끌어 낸다 하더라도 이는 지난 20일 박 전 대통령에 출당 권고 조치를 내린 자유한국당의 입장만 난감하게 할 뿐이라는 지적이다.

동시에 이는 박 대통령의 출당을 명분으로 한국당으로 넘어가려던 바른정당 통합파 의원들에게도 제동이 걸림을 뜻한다. 이미 바른정당 통합파 의원들은 16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당분간은 탈당 등 단체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국감 기간이라는 게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명분을 찾아 시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난감한 상황에 봉착한 것으로 관측된다.

한편 박 전 대통령이 “정치 보복”을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한 데는 당의 권고에 대한 간접적 ‘거부’도 내포돼 있다는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어 박 전 대통령이 자진 탈당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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