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파헤친다더니 ‘내로남불’격

SBS '그것이 알고싶다' 홈페이지·뉴스타파 '목격자들' 페이스북 화면 캡처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최근 한 방송 작가가 KBS 구성작가협의회 홈페이지에 “주말도 없이 24시간 일을 한다” “나는 ‘심부름꾼’이었다” 등 자신이 담당 PD(프로듀서)에게 당했던 부조리(不條理)를 폭로하는 글을 올렸다. 실제 SBS ‘그것이 알고싶다’, 뉴스타파 ‘목격자들’ 프로그램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알려져 논란이 거세다. 사회의 암연(暗然)을 파헤쳐 국민에게 알 권리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서 ‘갑질’이 일어나 진정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준말)이 아니냐는 비판을 면치 못하는 형국이다.

글 쓰려고 취직했는데···심부름꾼으로 전락해
‘낮은 급여’ ‘과도한 서열문화’로 작가들 울고 있다


지난달 24일 오전 KBS 구성작가협의회 홈페이지에 방송사의 갑질‧관행을 폭로하는 한 방송 작가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해당 홈페이지는 방송 작가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구인‧구직 등 정보를 공유하는 곳이다.

글을 쓴 A작가는 수년간 방송계에서 작가 일을 하며 겪었던 부조리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글 게시의 취지를 밝혔다.

A작가는 지난 2016년 SBS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에서 160만 원의 월급을 받으며 지냈다. 그러나 이마저도 월별로 받지 못하고 방송이 끝나면 6주 후에 일괄지급됐다고 한다.

근무 환경은 더 열악했다. A작가는 “그곳에선 24시간 일을 한다. 6주 중 기획주인 첫 주만 10시쯤 출근해 7시에 퇴근하고, 2~5주에는 밤낮도, 주말도 없이 일을 한다. 당연히 수당이고 뭐고 없다”면서 “밥 심부름에 커피 심부름이 주 업무고, 기껏 커피를 사왔더니 이거 말고 다른 메뉴 먹고 싶다는 선배의 말에 도로 내려가 다른 것을 사오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글을 쓴다는 알량한 자존심은 내려놓아야 하는 곳”이라며 심부름꾼처럼 일했던 과거를 회상했다.

A작가는 이러한 갑질 행태에 못 이겨 담당 피디에게 “어떻게 이렇게 일을 시킬 수 있냐”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담당 피디는 “여기는 똑똑한 작가가 아니라 말 잘 듣는 작가를 원하는 곳이다. 그렇게 똑똑하게 굴 거면 여기서 일 못한다. 다들 그렇게 일 해왔고, 그게 여기의 규정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A작가는 “밖에서는 정의로운 척, 적폐를 고발하겠다는 피디들이 내부의 문제에는 입을 조개처럼 꾹 닫았다”고 비판했다.

 
KBS 구성작가협의회 홈페이지 캡처
              최저임금보다 적은데
 
A작가는 같은 해 뉴스타파 ‘목격자들’ 프로그램에서도 작가로 일했다. 그는 해당 프로그램을 “놀라운 곳”이라고 표현했다.

프로그램 제작진은 면접 때도, 합격통보를 할 때도 임금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고 한다. A작가는 임금이 어느 정도냐고 묻자 담당 피디는 “공중파처럼 120만 원씩은 못 줘”라고 대답했다.

A작가는 “당시 공중파의 막내작가 페이(임금)는 약 140만 원가량이었고, 최저임금은 126만 원이었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임금으로 상근을 하며 프리뷰, 섭외 등 많은 일을 떠맡았다”면서 “시사 프로그램의 특성상 섭외나 후반작업이 굉장히 까다로워 근무시간은 항상 엄청났다”고 밝혔다.

이어 “갑질을 고발하는 그들이(제작진) 막내작가들에게 갑질을 하는 형국이 아닌가”라며 “나는 그곳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고 전했다.

A작가는 이렇게 꼬집었다. “그럼 당신(제작진)들도 나만큼 최저임금도 못 받으면서 일하나.”

이 밖에 근로 환경에 의문을 품은 A작가는 고용노동부에 온라인을 통해 고발했다. 그러나 그는 고용노동부의 답변을 받자 의지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A작가 주장에 따르면 고용노동부 소속 조사관은 그에게 “방송 쪽은 제대로 처리가 안 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면 조사 받으러 한 번 나와라”라고 말했다.

A작가는 조사관에게 왜 방송 쪽은 처리가 안 되느냐고 물었으나 ‘관례’라는 성의 없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이번 폭로와 관련해 SBS 측(그것이 알고싶다)은 “작가 및 보조 작가의 처우 문제를 포함해 프로그램 제작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전반적인 조사를 하고 있다”면서 “문제점이 발견되면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뉴스타파’ 측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현재는 최저임금이나 시간 외 수당 등 노동법을 다 지키고 있다”면서 “정확한 사실을 확인 중”이라고 말을 아꼈다.
 
‘막내작가’, ‘아가’
호칭 당연?

 
방송가(街) 작가들의 고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방송국 신입 작가 상당수가 ‘막내작가’, ‘아가’ 등으로 불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11월 15~17일 방송작가 279명을 상대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다.

지난해 12월 12일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279명의 응답자 가운데 ‘막내작가’로 불리는 작가가 70.3%로 가장 많았다. 이어 ‘스크립터‧리서처가 포함된 자료조사’(14.3%)와 ‘취재작가’(6.8%)라는 호칭이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부는 ‘OO(이름)아’, ‘아가야’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같은 호칭에 대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72.8%로 대다수를 차지했다. ‘고민해본 적 없다’는 의견은 20.8%, ‘적절한 호칭이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은 6.5%였다.

‘막내작가’ 호칭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복수응답)에 대해서는 ‘업무 외 심부름 등 잡일까지 쉽게 시키는 존재가 되는 것 같다’는 의견이 67.7%로 가장 많았다. ‘작가 뿐 아니라 팀 전체의 막내로 취급받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막내작가’로 불리는 작가군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응답자들은 ‘지나치게 낮은 급여(최저임금 보장)’, ‘보장되지 않는 출·퇴근 시간’, ‘과도한 업무량의 적절한 분업화’, ‘과도한 서열문화’ 등을 꼽았다.

5년 차 ‘입봉’(본인의 아이디어로 이름을 걸고 프로그램을 만든 적 있음을 의미) 작가는 “아직도 막내작가로 불리고 있다. 이제 3년차가 된 팀 조연출보다 인정을 못 받는 분위기라 좋은 기분은 아니다”라면서 “작가는 작가이지 PD가 아니며 소품 팀 직원도 아니고 홍보직원도 아니고 팀 비서도 아니다. 팀 구성원 별 업무 분담이 명확해야 하고 책임도 명확히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직장갑질119는 “방송작가의 ‘도제식 시스템’은 방송작가의 공정하고 합리적인 노동 환경 조성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며 “‘막내’라는 호칭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차가 낮은 작가라는 의미 외에도 업무 외적인 측면에서까지 위계질서를 구분하고 억누르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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