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하러 갔다가 성폭행 당해···언니‧동생 차례로 목숨 끊어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화면 캡처>
[일요서울 | 조택영 기자] 단역배우 A씨가 드라마 기획사 관련자 12명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명 ‘단역배우 자매 사건’의 재수사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23일 오전 기준 17만 명을 돌파했다.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는 가운데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과거 성범죄 사건들이 재조명 받는 상황. 단역배우 자매 사건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르면 다시 고소할 수 없는 사건이라 실제로 재조사가 이뤄질지, 청와대의 답변에 귀추가 주목된다.

경찰, 제2의 가해자로 지목돼···피해자, 충격으로 정신질환 앓아
일사부재리 원칙으로 재조사 가능성 낮아···故장자연 사건도 도마 위에


지난 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등록된 ‘단역배우 자매 사건 재조사 요구’ 청원에는 23일 오전 기준으로 17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온라인 서명을 하고 있다.

단역배우 자매 사건은 지난 2004년 친동생의 추천으로 단역배우 아르바이트(이하 알바)를 했던 A씨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12명의 드라마 기획사 관계자(보조반장‧부장, 캐스팅 담당자 등)들을 고소했다가 경찰 조사 단계에서 고소를 취하한 뒤 2009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격적인 사건을 말한다.

당시 보조출연자를 관리하는 보조반장은 수시로 A씨를 성폭행했으며, 뒤이어 그의 동료 11명이 A씨에게 성폭행‧성추행을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A씨는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았다.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어머니가 이들을 경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A씨는 조사 과정에서 경찰의 미흡한 대처로 2차 충격을 받았다. 경찰은 A씨를 칸막이가 없는 공간에서 가해자 앞에 앉혀놓고 진술을 받았다. 또 가해자들의 성기 모양을 구체적으로 그리라는 요구까지 했다고 한다.

가해자들은 한결같이 “합의하에 이뤄진 성관계”라며 A씨의 주장에 반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질 심문으로 2차 충격을 받은 A씨를 본 어머니는 1년 7개월 만인 지난 2006년 고소를 취하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고소를 취하한 이유로 가해자들의 지속적인 협박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A씨는 사건 충격으로 2009년 8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언니인 A씨가 사망한 6일 뒤에 충격으로 동생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망했다. 게다가 연달은 충격에 A씨의 아버지도 뇌출혈로 사망했다. 성범죄로 인해 A씨의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사망에 이른 것.

A씨의 어머니는 최근 방송에 출연해 “가해자들이 버젓이 드라마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제발 이 사람들을 업계에서 내쳐 달라”면서 재조사를 요구했다.
 
“가해자들
여의도에 아직 있다”

 
A씨의 어머니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이미 취하된 사건에 다시 고소를 할 수 없었다며 지난 2015년에야 민사 손해배상으로나마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 때로부터 약 9년 6개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때로부터 약 4년 6개월이 지났기 때문에 민법상 소멸 시효인 3년이 지났다”면서 소송을 기각했다.

A씨의 어머니는 방송에서 “(가해자들은) 여의도 (드라마) 업계에서 수장 노릇하면서 떵떵거리며 산다”면서 “몇몇은 기획사에서 일하고, 한 사람은 기획사 대표”라고 말했다.

A씨의 어머니는 가해자들이 현재 드라마 업계 현장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처벌할 수도, 배상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

또 A씨의 어머니는 가해자들을 처벌해 달라며 1인 시위를 했으나 가해자들이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검찰이 기소해 여론의 공분을 샀다. A씨의 어머니는 결국 지난해 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조사
‘완전 불가’는 아닐 수도

 
청와대 청원에서 재조사 요구가 17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을 만큼 사태의 심각성이 부각되고 있지만 실제 재조사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성범죄의 친고죄가 폐지되기 전에 발생한 사건인 데다 A씨 측이 이미 고소를 취하한 전력이 있기 때문. 법률상 이미 취하된 사건에 대해서는 다시 고소할 수 없다. 따라서 청원 동의가 아무리 많아도 법적으로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 경찰 관계자는 “형사 고소 취하로 재고소를 할 수 없고, 청원 동의가 충족되더라도 재조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설명했다.

A씨의 어머니는 방송에서 “성폭행 가해자는 12명이지만 딸을 죽게 만든 건 경찰”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A씨는 숨지기 전, 경찰의 2차 가해에 못이겨 차도로 뛰어들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시 A씨를 조사한 경찰에 대한 징계 역시 쉽지 않을 전망이다. 경찰 비위에 대한 징계도 시효가 있기 때문이다.

A씨의 어머니는 “사건을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국민 여러분들이 이 억울한 죽음에 대해 알아주길 바란다”면서 “청원 20만 명이 될 때까지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재수사가 가능한 돌파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고소 취하는 자유로운 의사 표현 상태에서 이뤄져야 하지만 A씨의 경우 가해자들로부터 협박을 받는 등 강제로 고소 취하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 만약 A씨 본인과 가족에 대한 살해 위협 등 의사결정의 자유가 박탈된 절대적 강박 하에 고소 취하가 이뤄졌다면 이는 무효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의사결정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는 수준의 협박으로 고소를 취하했다는 점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충격 사건에
정치권도 ‘부글’

 
이번 청와대 청원을 계기로 정치권도 충격을 안고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효은 부대변인은 지난 20일 논평에서 “‘원수 갚고 20년 후에 만나자’는 딸들의 유언을 되새기며 살았다는 어머니의 통곡이 들린다. 그 가해자들이 여의도 업계에서 떵떵거리고 산다는 말에는 기가 막힐 지경이다”고 분개했다.

이어 “두 딸이 죽임에 이르기까지 경찰은 피해자의 고통은 외면한 채 성폭행 당한 상황을 묘사하라고 하는 등 피해자를 두 번 죽였다”면서 “2004년 성폭행 후 2006년에 고소를 취하해서 재고소를 할 수도 없고 가해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지만, 억울한 죽음과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고 전했다.

정의당도 목소리를 높였다. 정의당 추혜선 수석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과거 성범죄 사건들이 재조명 받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 2009년 발생한 단역배우 자매 사망사건 재조사 청원은 13만 명을 돌파했으며, 故 장자연 사건 재조사 청원은 14만 명을 돌파했다. 두 사건은 모두 권력의 상하 관계 아래 피해자들이 강제적 성상납과 성폭행을 겪고 목숨을 끊으며 사회에 성폭력을 고발한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또 “결국 이들 사건은 죽음을 통해 이뤄진 피해자들의 간절한 ‘미투’인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모두 억울한 피해자만 있을 뿐,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다. 가해자 중 그 누구도 죄에 상응하는 죗값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과거의 성범죄 사건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미투와 앞으로의 미투 역시 근본적인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피해자들이 더 이상 미투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위해 피해자의 억울함만 남은 채 끝이 나는 성범죄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해결되지 않은 두 사건의 진상을 재조사하고, 가해자를 엄중히 처벌할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성범죄 피해자 보호 대책, 성범죄 공소시효 연장 등 성범죄의 실질적 해결방안 역시 적극적으로 마련되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정부 조치에
관심 모여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19일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가해자 퇴출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치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면서 “성폭력근절추진협의회, 문화체육관광부 등과 협의해 적절한 조치와 방안을 모색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 밖에 정치권에서는 “인면수심의 가해자들은 죄 값을 치르고 업계에 발을 못 붙이게 해야 한다. 경찰 역시 진실규명에 앞장서는 것만이 제3,제4의 피해를 예방하는 길”이라며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재조사 청원이 잇따르는 사건은 단역배우 자매 사건뿐만 아니다. 故장자연씨의 죽음의 진실을 밝혀 달라는 청원 참여 인원이 23일 오전 기준 20만 명을 돌파했다.

청원인은 청원글에서 “힘없고 빽 없는 사람이 사회적 영향력 금권 기득권으로 꽃다운 나이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만들고 버젓이 잘살아가는 사회 이런 사회가 문명국가라 할 수 있는가. 어디에선가 ‘또다른 장자연’이 느꼈던 고통을 받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우리의 일상에 잔존하는 모든 적폐는 청산돼야 한다”고 적었다.

당시 소속사 대표로부터 유력 인사들에게 성 상납을 강요받았다는 내용의 일명 ‘장자연 문건’이 폭로되면서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불구속 기소된 전 소속사 대표 B씨와 매니저 외에 유력인사 10명에 대해서는 ‘혐의 없음’으로 처분해 ‘봐주기 수사’ 의혹이 일었다.

장자연 사건 재조사의 가능성도 매우 낮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과거 성범죄 사건에 대한 청원‧동의가 잇따르는 만큼 청와대 답변과 조치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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