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다가 막판에 당시 민자당 대선후보였던 YS의 전방위 압력으로 ‘대통령 꿈’을 접은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이를 위해 김 전 회장은 당시 핵심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겨주는 한편 그룹기획조정설(기조실) 내에 대선출마 테스크포스팀까지 만들었다. 이같은 사실은 대우그룹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이었던 김우일 전 본부장이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확인했다.

김 전 본부장에 따르면 김우중 전 회장은 대통령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으나 YS측과 민자당이 국세청까지 동원해 대우그룹 전계열사에 대한 세무조사와 은행권을 이용한 대출회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대선 출마를 접었다는 것이다.김우중 전 회장이 대통령에 대한 야망을 품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때부터였다. 김우일 전 본부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당시 환경은 기업을 하기에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공정거래법, 여신관리 규정, 부동산 대책과 같은 규제 대책이 잇따라 발표되면서 담당자들이 세무서나 은행, 국정원, 공정거래위 등에 수시로 불려다녀야 했습니다. 그룹의 부동산 보유 현황도 정기적으로 보고해 팔라고 하면 무조건 팔아야 했습니다.”당시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 시절 기업간 과당경쟁 방지란 이름으로 도입한 산업합리화제도를 더욱 강화해 그룹마다 주력업종을 정해두었다. 대우의 경우 건설, 무역, 조선, 전자, 자동차, 기계 분야가 주력업종이기 때문에 이 분야에만 투자가 가능했다. 화학이나 선박과 같은 비주력 업종의 경우 참여가 원천적으로 봉쇄됐다는 것이다. 심지어 주력 업종일 경우에도 다른 회사의 주식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계열사나 부동산을 팔아야 했다. 이같은 정부의 규제책에 대해 김 회장의 반감이 적지 않았다는 게 김 전 본부장의 설명이다. 김 전 회장이 대선출마의사를 공식적으로 그룹임원들에게 피력한 것은 대선을 코앞에 둔 92년 중순경이었다. 김 전 본부장은 “김 전 회장은 92년 중순 무렵, 북경의 한 호텔에 임원들을 모아놓고 ‘아무래도 대선에 출마해야 할 것 같다’며 폭탄선언을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그룹 기획조정실에서는 비공식적으로 김 회장의 대선 성공 가능성을 타진했다. 기조실의 판단은 일단 긍정적이었다. 김 회장의 인맥과 계열사 직원, 회고록을 읽은 사람들을 합할 경우 ‘합격선’인 800만명의 득표가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물론 김 회장의 대선출마의사는 주변 정치인들의 부추김이 배경이었다. 상당수 정치인들이 당시 김 회장과 같은 배를 탈 뜻을 내비쳤다. 김 회장도 당시 대우 경영권을 포기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선 출마 준비는 급속도로 진행됐다.그러나 김 회장이 의욕을 가지고 시작한 대선 행보는 얼마 가지 못했다. 당시 민자당 후보였던 YS측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우선 (주)대우를 포함한 계열사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가 단행됐다. 당시 대우그룹이 추징 당한 세금만 600억원에 달한다. 그것도 단 1주일만이었다. 금융기관에서도 대출을 회수하겠다는 압박이 연일 계속됐다. 신문들은 ‘대우그룹 붕괴설’과 같은 괴담을 끊임없이 풀어놓기 시작했다. 결국 김 회장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지 몇 개월만에 항복을 선언했다.

김 회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그룹일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혔다.“전체 임원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이때부터 김 회장은 그룹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대통령의 꿈을 접은 이상 경제 대통령이라도 돼보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김 전 본부장은 이 사건이 대우그룹의 향후 진로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김 회장이 그룹 일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경영을 위해 무리한 투자를 하게 된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특히 YS를 공개 지지한 탓에 후에 DJ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는 김 회장이 당시 DJ를 물밑 지원했다는 그동안의 주장과 다른 주장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다음은 그가 털어놓는 일화 한토막. 대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DJ의 최측근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당시 김 전 본부장은 이들을 만나는 것이 김 회장에게 부담이 될 수 있어 다른 직원을 보냈다고 한다. 현장에 가보니 DJ의 최측근 보좌관인 A씨와 비서실장 출신의 B씨가 나와 있었다. 이들은 대우 직원에게 ‘도와달라’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김 회장이 DJ를 지원했다면 이들이 일부러 우리를 찾아왔겠느냐는 게 그의 설명이다.

# 김우중 전 회장과 YS 그리고 DJ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정계진출설은 92년 당시 정·재계에 파다했다. 김 전 회장의 정계진출을 적극 권유한 사람은 김용환전 자민련 부총재와 이종찬 전 의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해 92년 5월경 터져나온 세칭 ‘한남동 3인회동설’은 그야말로 정·재계의 핵폭탄이었다. 김우중-김용환-이종찬 3인이 한남동 모처에서 극비회동해 김 전 회장의 정계진출을 확정했다는 것이 그때 돌았던 얘기였다. 실제로 이종찬 전 의원은 민자당이 출범하자 따로 나와 가칭 새한국당이란 정당을 만들었다. 이 당에 김우중 전 회장을 영입하고, JP를 끌어안아 대선에 나선다는 게 골자였다. 이들 3인은 내각제를 당론으로 채택하고 작업에 들어갔으나 막판에 김 전 회장이 정계진출 의사를 철회하면서 무산됐다.

대우그룹은 YS 정권이 끝나고 DJ 정권이 출범한 뒤 한동안 잘 나갔다. 당시 김용환 전 부총재가 DJ 정권의 핵심 인물로 기용된 것이 대우에는 결정적인 우군이었다. 정권 초 재계를 강타한 빅딜도 대우그룹을 염두에 두고 정권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라는 관측을 낳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김 전 회장의 몰락은 이헌재 전 부총리 등 DJ 정권에서 경제정책을 주도한 실세들이 대우그룹을 버리면서 시작됐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정·재계에는 ‘대우는 죽이되, 김우중은 (해외로) 보내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 1999년 말 김 전 회장이 해외로 출국하게 됐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얘기 하나는 당시 재계에서는 ‘누군가 김우중을 몰락시켜 실리를 챙기려는 세력이 대우그룹을 붕괴시켰다”는 말이 있었다는 점이다. 알짜배기 대우그룹 계열사를 공짜로 꿀꺽하려는 음모론이 나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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