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노동’ 상징 된 스태프…뒤틀린 제작 환경 탓

<뉴시스>

[일요서울 | 권가림 기자]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위상은 나날이 높아지는 추세다. 국내 관객층이 두터워지고 해외로 판권을 수출도 한다. 하지만 제작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오랫동안 방송가의 고질적인 병폐로 꼽혀 온 문제들은 개선의 움직임이 없다. 전직 방송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드라마 제작 환경은 ‘재난 현장’에 가깝다. 근로자 지위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스태프들의 ‘눈물’에 대해 알아본다.


- MBC 드라마 ‘검법남녀’ 제작진, 초장기 노동에 시달려
- 영화 스태프 월 평균 수입 164만 원…한국영화 관객 1억 명의 그늘



MBC 월화드라마 ‘검법남녀’의 제작진은 초장기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익명의 제보자 A씨는 한빛미디어노동자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 미디어신문고를 통해 ‘검법남녀’ 촬영일지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스태프들은 지난달 29일부터 지난 1일까지 총 나흘간 하루 평균 3~4시간의 수면 을 보장받은 채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검법남녀’에서 제작진으로 일하는 친구를 대신해 제보하게 됐다는 A씨는 “실질적으로 스태프들을 고용하고 계약한 사람들은 정말 인권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인가 보다. 이건 정말 너무한 것 아닌가. 버스 이동 중에 자는 것, 현장에서 조는 것이 쉬는 건가”라며 “제작사 내부에 제작이사라는 사람은 친구가 SNS에 ‘밤샘촬영 힘들다’라는 식의 게시물을 올리면 제작사가 신고당한다고 게시물을 올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신고 당하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일을 시켰다고 이해하면 되느냐”라고 반문하는 글도 함께 보냈다.

이러한 제보를 받은 한빛센터는 MBC 측에 제작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공문을 발송했다고 밝혔다.
 

한 드라마에 80명 스태프
계약서 작성 안 해
 


1990년대 후반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외주제작사는 현재까지도 대부분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 이들이 배우 섭외와 특정 작가의 작품 등을 조건으로 방송사에 편성을 요청하면 방송사는 가부를 결정한다.

외주제작사와 방송사가 계약을 맺으면 방송사 PD가 연출을 맡는다. 현장 스태프의 80~90%가 외주 노동자다. 인력은 연출팀(지휘 라인의 연출자, 조연출팀, 인력관리·비용 등을 담당하는 제작팀), 기술팀(녹화·영상·음향·조명·카메라), 미술팀(분장·세트·의상·미용) 등으로 나뉜다. 드라마 한 편당 투입되는 스태프는 대략 90~180명이다.

계약은 주로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된다. 모든 스태프가 외주제작사와 계약을 맺거나 각 스태프 부문장(촬영감독, 음향감독, 조명감독)이 본인 팀의 막내 임금까지 통으로 계약을 한다. 단 후자의 경우 임금 배분에 기준이 없다.

지난 2015년과 2016년 두 편의 드라마 촬영 보조스태프으로 활동했던 B씨는 장시간 노동 문제가 근절되지 않는 원인으로 이 같은 ‘불합리한 고용계약’을 꼽았다. 그는 “원칙대로라면 촬영감독이랑 계약서를 써야 한다. 물론 그런 경우는 없다.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는 식이기 때문이다”며 “계약서를 써도 눈치 때문에 본인이 원하는 만큼 챙기지 못한다. 당시 시급 3800원 받았다. 월 150만 원인 셈이다”라고 밝혔다.

실제 방송제작 현장에서는 스태프 채용이 계약서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져 왔다. 이상돈 국민의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12일 발표한 방송제작 스태프 계약실태조사에 따르면 방송제작 스태프 응답자 2007명 중 76.2%는 서면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B씨에 따르면 첫 촬영은 1회 방영 한 달 전쯤 시작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대본 집필이 늦어지고 분량이 변하며 생방송 형태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장시간 근로 문제가 드러난다. 그는 “아침 7~7시 30분에 촬영을 시작해 평균 새벽 2~3시에 끝난다. 가장 늦게 끝나는 시간은 4시다. 뒷정리하고 바로 7시에 다시 집합해야 한다”며 “드라마 제작 기간 3~5개월 중 70~80%는 이 같은 스케줄로 진행된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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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정 다산인권센터 활동가에 따르면 방송노동자들은 지난해 기준 하루 평균 19.18시간, 일주일 평균 116.8시간, 한 달로 산술적인 시간으로만 하더라도 507.4시간을 넘게 일을 하고 있다.

OECD 회원국 월평균 노동시간은 지난 2016년 기준 147시간(연평균 1764시간)이고 최장시간 노동국가인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 장시간 노동을 하는 한국 일반노동자는 월평균 노동시간이 172시간(연평균 2069시간)이다.

방송노동자는 월평균 2.9배에 가까운 노동을 하는 셈이다.

한 달에 고작 쉴 수 있는 날은 3~4일밖에 되지 못한다. B씨는 “과연 쉬는 날이라 말할 수 있을까. 쉬기 전날엔 다음 날 촬영이 없으니 해 뜰 때까지 촬영하는 경우가 다반사다”며 “집에 가서 쓰러져 자다가 저녁 8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 촬영 준비를 해야 한다”라고 했다. 퇴직자가 늘어나 그나마 있는 쉬는 기간마저 점점 줄고 있다고 한다.

드라마는 하루 평균 20~25신을 촬영한다. 출연 인원이 많을 경우 한 사람이 10분만 늦으면 최대 250분, 즉 4시간이 미뤄진다. 그래서 자리도 비울 수 없다.
 

8만2912명 영화 스태프
초과 근로 수당 받지 못해

 

비단 방송계의 문제는 아니다. 국내 영화산업이 5년 연속 한국 영화 관람객 수가 1억 명을 넘을 만큼 전성기를 맞고 있지만 영화 스태프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미술, 음악, 편집 등 영화 스태프는 8만2912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초과 근로 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영화 제작업은 근로기준법(제59조)에 근로자 대표와 사용자가 서면합의하면 주 12시간을 초과해 연장 근무할 수 있는 직종이다. 장소, 날씨, 배우의 스케줄 등 현장에서의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로 스태프 하루 평균 근로시간을 추측해 임금을 지급하는 ‘포괄임금 계약’을 맺는다.

문제는 근로시간이 포괄임금 계약에 실제보다 적게 반영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계약서 작성도 없이 주는 대로 임금을 받은 경우도 있다.

표준근로계약서 제도가 한국 영화 시장에 정착한 지 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대형 투자·배급사들만 표준근로계약서를 준수하는 분위기다.

저예산 독립·예술 영화 시장에선 ‘하늘의 별 따기’다. 표준근로계약서 체결 자체가 법적으로 강제된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예산 여유가 없다.

이 때문에 영화 1편당 8~10개월가량 걸리는 제작 기간 스태프들의 연평균 수입은 지난 2016년 기준 1970만 원으로 월 164만 원 남짓이다. 하위 직급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영화 제작 인력 가운데 세 번째 서열인 서드는 연평균소득이 1024만 원(월 85만 원)이며 수습(막내)은 657만 원(월 55만 원)에 그친다.

이와 함께 영화진흥위원회가 682명의 스태프를 대상으로 조사한 ‘영화 스태프 근로환경 실태’에 따르면 스태프들의 1일 평균 근로시간은 13.18시간, 주당 평균 근로일수는 5.45일이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정부 차원의 제도적 보완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제작 스태프들은 대다수 계약직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노동자 인권 보장뿐만 아니라 사고에 대해서도 별다른 보상을 받기 어렵다”며 “이들의 노동 환경을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고용노동부에서 주기적으로 실태 점검을 하지 않은 것도 문제 원인이라고 본다. 특수직업에 따른 전담 부서나 직원 등을 배치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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