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이심전심이었을까. 이즈음 난이도 권부학당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제현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봄날의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어느 날. 난이는 아버지 권부에게 여쭈어보았다.
“아버님, 이제현 도령의 학문이 어떠한지요?”
애지중지 키워 온 둘째 딸이 애제자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권부는 난이가 벌써 여인으로 성숙했음을 느꼈다.
권부의 목소리는 잔잔했으나 자애로움 속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난이가 제현이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 정혼(定婚)을 할 나이가 되었나 보구나.”
“아니, 아버님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느니라.”
난이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다 큰 딸을 바라다보는 권부의 얼굴에는 넉넉한 애정이 흘러 넘쳤다.

격구가 맺어준 첫사랑

오월 단옷날이 돌아왔다.
단오는 고려시대 9대 명절의 하나로 일 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다. 해마다 단옷날에 여자들은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하고 그네뛰기를 했으며, 남자들은 씨름시합을 했다. 황궁에서는 격구(擊毬) 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권부학당의 문생들도 체력 단련을 겸한 격구대회를 하기 위해 궁성 밖 격구장에 모였다. 스승 권부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일장 훈시를 했다.
“격구를 잘하는 사람이라야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되는 법이다. 너희들은 백면서생(白面書生)이 되면 안 된다. 학문에 몰두하기 위해서라도 격구를 통해 심신을 단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알겠느냐.”
스승의 훈시가 끝나자마자 문하생들은 나이를 기준으로 두 편으로 갈라서 격구대회를 시작했다. 반 시각이 지났을까. 격구에 몰입하던 이제현은 상대편 학동이 공채로 타구한 공(나무를 둥글게 깎음)에 머리를 맞아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눈꺼풀은 벌써 반쯤이나 감겼고, 동공은 움직임이 없었다.
혼절한 이제현은 곧바로 학당의 방으로 실려 갔다. 박충좌, 최해, 안축이 이제현을 방 한쪽에 눕힌 뒤 딱딱한 베개로 머리를 고정시켰다. 그동안 스승 권부는 가노(家奴)를 보내 의원을 불렀고, 소식을 들은 의원은 부리나케 달려왔다. 다행히 중태는 아니어서 의원이 다녀간 잠시 후, 이제현은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부스스 떴다. 그는 격구장에서 자신이 공에 머리를 맞아서 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권부의 부인 옆에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처녀가 물그릇을 권하며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정신이 좀 드세요? 찬물을 드릴까요.”
이제현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고마워요, 아가씨.”
말에서 낙상(落傷)한 이후의 기억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지만, 이제현은 찬 물수건으로 자신의 이마를 정성스레 닦아주고 있는 처녀가 오매불망 연모하던 난이 아가씨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서글서글하고 해맑은 두 눈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름다운 어깨와 가슴 속에 두 개의 봉긋한 꽃봉오리를 숨긴 연꽃 같은 처녀가 살포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제현은 난이를 보자 심장은 터질 듯 고동치고 맥박은 빨라지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한참 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저는 제현 도령이 끝내 못 일어나시면 어찌하나 하고 걱정했답니다.”
“고, 고맙습니다.”
이제현은 난이의 청아하고 해맑은 목소리에 전신이 오그라들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꿈속에서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그녀. 그녀가 지금 자신과 함께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귀신에게 홀렸거나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시간아 제발 더디게 흘러다오…….’
“무엇을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시지요?”
“아, 아닙니다.”
난이가 재우치는 바람에 한동안 몽상에 빠져 있던 이제현은 깜짝 놀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저를 이렇게 정성스레 보살펴 주시니 고마움에 그만…….”
“아이참, 저는 마땅히 할 일을 다한 것뿐인데…….”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 하는 난이의 청순한 얼굴과 샛별처럼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이제현의 넋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때 스승 권부는 유난히 난이에게 관심을 보이는 제자들이 많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는데, 난이가 이제현에게 관심을 보이자 부인과 함께 이제현의 병간호에 참여시킨 것이었다.
권부의 부인은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외명부의 정3품 벼슬) 유씨(柳氏)로 자손을 예의로 가르치고 비첩(婢妾)을 의리로 부리며, 얼굴에 분을 바르지 않고 몸에 비단옷을 입지 않은 현숙한 여인이었다. 이러한 어머니의 아름다운 품성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난이가 뭇 학동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오히려 당연했다.
이제현과 난이는 이렇게 격구로 첫사랑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이제현은 난이에 대한 그리움에 도저히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동창이 훤히 밝아 올 때까지 출렁이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았고, 기쁨의 바다에서 함성을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난이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잠들어 있는 고요한 늦은 밤 시간, 저벅 저벅 저벅…… 난이는 자신의 침상으로 다가오는 이제현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환청에 사로잡혔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이따금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가 잦아들 때, 홀로 외로움에 지친 난이는 여종 사월이를 통해 분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쪽지를 이제현에게 몰래 전했다.

이 도령께.
이 도령을 만나본 이후 잠 못 드는 밤이 많아졌습니다. 몇 번이고 망설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리움에 지쳐 소식 전합니다. 만약 우리의 만남이 운명이라고 생각되시거든 이틀 후 새벽 첫닭이 울 때 우리 만나요. 십자가 서쪽 앵계(鶯溪) 개울 옆 정자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곳에서 사월이가 느티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도령님을 인도해 드릴 것입니다. 소녀를 많이 기다리지 않게 해주세요.
난이 올림.


이제현은 난이를 만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으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전반측(輾轉反側) 수많은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었는데, 지성이면 감천이라 그리운 이로부터 연서(戀書)를 받은 것이다. 이제현은 난이의 당돌한 편지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자신에게 없는 적극성이 오히려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이틀 후, 녹음방초(綠陰芳草)가 우거진 초여름 새벽 공기를 가르며 정자로 가기 위해 후미진 담장길 모퉁이를 돌아 두 여인이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장옷을 입은 난이와 그를 시종하는 계집종 사월이었다. 밀회 장소인 정자에 미리 올라 앵계를 따라 굽이쳐 흐르는 개천의 운치를 느끼고 있던 이제현은 두 여인을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한 파수꾼 사월이는 멀찌감치 물러났고, 정자 안으로 은은한 새벽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앵계를 감싸고 있는 희뿌연 새벽안개 속에 선 두 사람은 마치 태초의 아담과 이브가 된 듯했다.
달빛은 난이의 옥색 장옷을 다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윽고 어스름 구름이 보름달을 가리자 달빛은 침침해지고 두 사람의 밀회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교교한 달빛에 반사된 나뭇잎은 새벽바람에 살랑이는데 두 사람의 침묵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이제현은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이 서 있는 난이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의 맹세를 했다.
“내 마음은 저 달만 알 것입니다. 미생(尾生)의 기다림으로 강물에 빠져 죽는다 해도 나는 난이 아가씨를 기다릴 것이오.”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미생이라는 사람이 다리 밑에서 만나자고 한 여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홍수도 피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익사하여 ‘미생지신(尾生之信)’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미생의 고사를 인용한 이제현의 맹세에 감동한 난이는 초롱불에 나부끼듯 설레는 마음으로 화답했다.
“저도 도련님의 충실한 벗으로 살아갈 생각입니다. 언제나 ‘두루미 목’을 하고 도련님을 기다리겠어요.”
“난이, 우리 일생 동안 헤어지지 맙시다.”
“도련님, 저도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요.”
난이는 사랑을 하게 되면서 여린 소녀의 면모를 벗어던지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강한 여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이제현은 자신의 가슴속에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정열의 불꽃을 끌 수가 없었다. 그는 난이의 곁으로 성큼 다가가 두 팔로 가녀린 여인의 허리를 껴안았다. 난이는 엉겁결에 그의 품에 안기고 말았다.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바라던 이제현의 품에 얼굴을 기댄 난이는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결에서는 창포 향기가 나고 있었다.
앵계를 따라 짙게 깔렸던 여름 새벽안개가 걷히고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들에 나올 무렵 두 사람은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날 밤, 이제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두 사람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돌이켜 보았다. 그리곤 난이를 두 팔로 감싸 안은 것이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날 첫 밀회 이후 이제현의 마음속에는 온통 난이뿐이었다. 난이는 고전에 나오는 값진 보석과도 같았고, 이제현은 그 보석을 얻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팔아버린 바로 그런 사람이 되었다. 공부, 노력, 경건한 마음 등 모든 것을 이제현은 난이를 위해 바쳤다. 그리고 매일 두 사람이 결합하게 해달라고 부처님과 천지신명님께 기도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남들의 눈을 피해가며 새벽에 만나 서로의 연정을 확인하곤 했다. 두 남녀가 새벽녘에 밀회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사월이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랑이 익어가는 만큼 이제현의 고민도 깊어 갔다.
그리고 두 달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현명하고 사려깊은 이제현은 많은 생각과 번민 끝에 미래에 대한 확신 없이 난이를 자주 만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습관처럼 난이를 만나 애정의 싹을 키우면 감정은 더욱 격렬해지고 학문 정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이제현은 꿈을 이룰 때까지 둘이 만나는 것을 중지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 결심을 실행에 옮기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린 이제현은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붓을 들어 난이에게 심정의 일단을 밝히는 서찰을 한 숨에 써내려갔다.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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