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지도부는 3월중순 노무현 정부의 친북 유화책에 갑자기 장단을 맞추고 나섬으로써 당의 정체성에 혼선을 빚어냈다. 그들은 북핵 불능화 조치가 이행된다면, 그동안 반대해왔던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을 지지하고, 차관방식 쌀지원을 무상으로 공여하겠으며, 상호주의 원칙도 재고할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한나라당 지도부는 정책변화의 근거로 6자회담의 2·13 합의문과 한반도 및 국제정세의 급변을 내세웠다. “북미수교나 남북정상회담이 생각보다 빠른 시일내 이루어질 수 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큰 변화가 지금 일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큰 변화가 일고 있다”는 한나라당의 예단은 너무 성급하고 경솔하다. 한나라당의 예견대로 북미수교의 빠른 성사는 아직 보이지 않고 미국의 대북정책에도 근본 변화는 아직 없다. 더욱이 북미수교와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는 반드시 북한이 2·13 합의문을 앞으로 실천에 옮겨갈 때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북한의 합의문 실천의지는 의심된다.

북한은 2·13 합의 후 2주일만에 서둘러 남북장관급회담을 열고서는 남한으로부터 쌀40만t과 비료30만t 지원 약속을 챙겨갔다. 그러면서도 북한은 2·13 합의문 실천을 위한 6자회담에는 참석조차 거부했다. 북한 대표단은 미국이 홍콩의 델타방코아시아 은행에 묶어둔 북한돈 2,500만달러를 북에 송금 완료치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회담을 거부한채 평양으로 돌아간 것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악의 축’이라며 불신하면서도 2·13 합의문에 서명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서 서명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거짓말장이’로 간주하는 부시의 불신마저 사라졌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북한이 2·13 합의문 이행 과정에서 속임수를 쓴다면, 부시는 김정일은 역시 ‘거짓말장이’라며 돌아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큰 변화’를 예고하며 미북수교가 ‘빨리’ 이뤄진다고 앞질러 갔다. 2·13 합의문을 크나큰 업적으로 내세우는 열린우리당의 과장선전을 한나라당이 확대 재생산해주는 결과밖에 안된다. 집권세력의 친북유화에 장단을 맞추는 격이다.

또 한나라당은 남북정상회담에 관해 “핵 문제를 해결하고 북한이 개방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라면 우리가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노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다고 해도 북한을 개방치 않을 것이며 핵도 포기치 않으리라는데서 정상회담을 서둘러서는 안된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은 돈을 바쳐가며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성급히 추진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그때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핵무기를 폐기한게 아니고 도리어 김대중씨가 몰래 찔러준 돈으로 핵무기를 만들었으며 개방 대신 폐쇄의 고삐를 결코 풀지 않았다.

그밖에도 한나라당은 “북핵만 불능화된다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도 반대하지 않으며 차관에 의한 쌀 지원도 무상으로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은 핵을 불능화할 리 없다.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10명중 8명이 북한은 2·13 합의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불신했다. 북한은 핵의 불능화 시늉만 내며 핵폭탄을 기정사실로 인정받고 미국의 대북제재를 풀며 한국으로부터는 경제지원을 챙기기만 할뿐, 폐기 하지 않는다.

설사 북핵이 불능화되었다손 치더라도 금강산 관광과 개성사업·쌀·비료 지원 등은 북한의 군자금으로 쓰인다는데서 신중해야 할 사안이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2·13 합의문이 발표된지 한달 밖에 안되는 불확실한 마당에서 대북 기본노선을 뜯어고치겠다고 나섰다. 원칙도 줏대도 없는 기
회주의 정당같이 처신한다. 좀더 지켜보며 신중히 임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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