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조상대대로 이어받은 삶의 기본적 철학이 있다. 다름 아닌 밥은 열군데 가서 먹어도 잠은 한군데서 자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거처가 일정해야 한다는 뜻이겠지만, 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말일 것이다.날으는 새나 산짐승도 살기 위해 낮 동안 온갖 먹이를 찾아 헤매다가 밤이 되면 제집을 찾아드는 법이다. 하물며 인간에게 있어서야 보금자리의 소중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을 일컬어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다. 사람은 생각하는 능력을 무기로 동족집단 내 각 분야에서 생업을 위한 여러 갈래의 일을 한다. 따라서 여러 군데 밥을 먹으면서 공동사회 발전과 더불어 자신의 보금자리를 지키고 키우는 행위를 계속한다.그런 가운데서 약육강식의 동물적 본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생각하는 인간세계 내면에 그 같은 동물적 근성이 엄연한데 우리사회의 개인주의, 이기주의, 기회주의는 시대·변화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코 사라질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사는 환경이 어려워질수록 살아남기 위한 사회적 동물들의 전쟁은 치열하고 처절해질 수밖에 없다. 모르긴 해도 우리조상들이 남긴 ‘잠은 한군데서 자라’고 했던 말은 바로 이를 경계한 것일 게다.말하자면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 환경이 달라져서 비록 밥 먹을 자리를 조석으로 바꾸더라도 자신의 기본 틀은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틀’이라 함은 사물의 가장 중요한 밑바탕, 즉 근본, 기근(基根)을 일컫는 말이다.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므로 세상사는 가치관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머리속 생각이 굳어지면 가슴속 신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러한 신념이 물리적 힘에 굴복해서, 또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소신을 버리는 행위는 바로 자신의 ‘틀’을 깨버리는 짓이다. 인간이 자신의 틀을 벗고 양지를 좇아서 정신적 둥지를 옮겨 다니면 한 마리 철새의 삶을 살아가는 형상이 되고 만다. 이런 인간 철새족이 우리사회에 끼친 악영향은 필설로 다하기가 어렵다. 변절과 배신이 살아가는 지혜처럼 보였던 시절도 있었다.군사독재시절 통제받지 않는 기관권력이 걸핏하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을 끌고가 개패듯 해대고, 때로는 눈알 뒤집힐 정도의 황금으로 회유하기가 일쑤였다. 독재정권이 인식하는 지식사회의 소신 따위는 공자 왈 맹자 왈 시대의 전유물에 불과할 따름이었다.때문에 소신을 굽히지 않고 독재 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민주화 투사들에게 국민은 그들 속내를 모른 체 그저 환호하고 열광만 했다. 국민은 어리석게도 그들이 차례로 집권에 성공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투사’의 허상을 느끼는 듯했었다. 감추고 있던 발톱을 있는대로 드러내서 온갖 신악(新惡)을 창조한 무리들이 국민을 얼마나 깔봤으면 역사에 대한 조그만치의 죄의식도 없어 보인다.국민이 더는 속지 않기를 원했던 나머지 노무현 정권이 출범했다. 아는 바와 같이 비록 기반이 약해보이고 덜 미더운 구석이 없지 않았지만, 소신있고 정직하면 국민의 지지로 나라가 잘돼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국민들 생각이 어떠할까? 과연 경제문제 때문에만 국민 80% 가까이가 정권을 외면할까?형편따라 말 바꾸기를 능사로 알고, 그러자니 자신의 기본 ‘틀’은 간곳이 없어지고, 또 때로는 오만의 극치를 나타내고…하는 변화무쌍한 사람들이 잠은 한군데서 자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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