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 보고 놀란 가슴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자라 모가지에 자주 놀라다보면 놀라는데 면역이 생겨서 정작 뱀 대가리가 나타나도 크게 경악지 않는 이치 또한 사실일 것이다.그래서 그런지 5월말 지방선거를 앞두고 빚어지는 정치상황이 전례 없는 독선과 정치부도의로 흘러가도 국민은 그리 놀라워하는 기색들이 아닌 것 같다. 장관자리가 지난 총선 때 여당 후보로 나서 고생했거나 정권창출에 공헌한 보상의 성격인 것을 알았을 때도 그러했지만, 이제 그 장관자리가 벼슬길 택호(宅號)를 높여주어 오는 지방선거에 인지도를 넓힐 계산이 작용된 것으로 드러나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충격스러워 하지 않는다. 옛날 같으면 온 나라가 들끓었을 일인데도 말이다.과거 독재정권이 선거를 앞두고 여당의 선심성 공약에 힘을 싣기 위해 해당사업 주무 장관을 현지 정치행사에 징발한 적이 없지 않았다. 이때마다 관권선거 규탄집회가 일어나고 공무원의 정치중립원칙 파괴를 비판하는 비등한 여론 때문에 서슬 퍼런 철권통치로써도 한껏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더욱이 뚜렷한 생산적 과제 없는 여당 새 지도부의 특정지역 방문행사에 그 지역 출신 장관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우고 따라 내려가 앞장서서 정치적 구호를 외쳐대는 가관의 일 따위는 아무리 간 큰 정부도 낯이 뜨거워서라도 일찍이 할 수 없었던 일이다. 특히 그들 두 장관이 곧 지방 선거 출마자로 징발될 처지에 놓여 있다면 이게 어디 헌법상의 공무원 정치중립 조항을 무시했다는 질타만으로 끝날 일이겠는가.사실상의 여당 선거운동에 동참해서 사전 선거운동을 획책한 탈법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 지금 각 지역에서는 출마 예상자 신분으로 사람 모인 곳에서 명함 몇 장 돌린 것까지 사전 선거운동으로 지목받아 고발장이 접수되고 있는 마당이다. 또 연임에 도전하는 현직 단체장들은 사전 선거운동 시비 때문에 지역 현안행사 일체를 가급적 선거 뒤로 미뤄야 하는 점을 잘 알 것이다.한 구절로 해 ‘윗물은 더럽고 추한 악취를 풍겨내더라도 아랫물은 맑아야한다’는 억지를 우리는 뻔한 눈으로 지켜봐야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국민은 뭘 더 따지지도 기막혀 하지도 않겠다는 눈치다. 백주에 뱀 대가리가 보여도 다행히 뱀에 물리지만 않는다면 뱀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냥 보고 있자는 진한 체념이 느껴진다. 이걸 정치 허무주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우리가 사람을 대하고 평하면서 유념해야 할 것이 상대의 아홉 가지 단점을 보지 말고 한 가지 장점을 취하라고 했다. 이는 상생의 인과관계를 위해서는 개성 다른 사람들끼리 나타나는 아홉 개 단점을 한 개 장점으로 능히 상쇄시켜야 한다는 전제다. 그런데 정치는 아흔 아홉 가지 선정(善政)이 한 가지 악정(惡政)을 상쇄시킬 수 없다고 했다. 치란(治亂)의 위기가 나라의 근본을 흔드는 까닭일 것이다. 때문에 정치를 순리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가 전선을 형성해서 민심을 불안케 하고, 전투적 투혼을 불태워 살의를 뿜어대는 정치현실이 나라장래를 위한 것이라면 소가 웃을 노릇이다.이렇게 나라 사정은 치란의 위기를 맞고 있는데도 세상 흐름은 순리를 거역하지 않는다. 종교계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이 나라 두 번째의 정진석 추기경이 탄생했다. 나라의 경사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정 추기경의 한 말씀을 새겨야한다. “독점하려는 과욕과 탐욕이 불행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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