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뉴질랜드의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1월 11일 88세의 노환으로 별세했다. 전 세계 언론들이 그의 타계를 애도하며 대서특필하였다. 그의 따뜻하고 에베레스트 산 만큼이나 높디높은 숭고한 인간애 때문이다.

뉴질랜드에서 꿀벌을 치던 힐러리씨는 33세 때인 1953년 봄 영국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가했다.

그는 영국 대원들이 1차 정상 공격에 실패하자 세르파인 텐진 노르게이와 함께 정상 도전에 나서 5월29일 성공했다. 그 위업으로 그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나이트(Knight) 작위를 받아 ‘경’(Sir) 칭호를 쓰게 되었다.

55년전과는 달리 지금은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도 많은 편의 시설 설치로 쉬워졌다. 위험한 빙벽 곳곳에는 60여개의 알루미늄 사다리가 가설되어 있고, 수천 미터에 달하는 로프가 여기 저기에 고착되어 있다. 그런데도 에드먼드 경의 등반 성공 이후 2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3000여명은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에드먼드 경은 영국 대원들 몰래 가슴에 챙겨두었던 뉴질랜드 국기를 꺼내 에베레스트 정상에 묻었다. 그는 조국 뉴질랜드에 대한 애국심이 남달리 강렬하였다.

그는 애국심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복에 운명을 건 네팔 세르파의 고마음을 평생 잊지 않고 그들의 가난한 삶을 끌어올리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는 1975년 네팔로 가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처와 딸을 잃었지만, 네팔에 대한 봉사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그는 작년까지 무려 120차례나 넘게 네팔을 찾았다.

그는 1962년 네팔 구호기금인 ‘히말레이안 트러스트’를 설립하였다. 이 구호기금으로 네팔에 27개의 학교, 12개의 진료소, 2개의 병원, 2개의 공항 활주로, 20여개의 교각 등을 건설하였다. 그가 개설한 학교에서 헐벗고 굶주리던 세르파 자녀들은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이제 어엿한 공공기관과 사기업의 장 또는 간부로 활동하고 있다.

맨발로 살아가던 한 소년은 에드먼드 경이 건립한 학교에서 공부해 여객기의 파일럿이 되었다. 그는 “에드먼드 경이 없었더라면, 세르파들은 지금보다 50년 내지 100년은 뒤져 있었을 것”이라며 그의 헌신적인 공로를 치하했다.

에드먼드 경은 누구나 굳은 의지만 가진다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는 “나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게 아니라 내 마음을 정복했다”고 밝힘으로써 인간의 굳은 의지와 노력을 강조했다.

그는 또 “모험은 나처럼 평범한 자질을 가진 평범한 사람도 할 수 있다”며 자기자신을 낮추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모험 없이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고 역설, 용기있는 도전을 장려했다.

에드먼드 경은 에베레스트 정복 후 1957∼1958년 영국의 연방국 팀과 함께 남극대륙을 횡단했고, 1985년 쌍발 스키 비행기로 북극에 착륙했다. 그는 1980년대 중반 인도, 방글라데시, 네팔의 순회 대사직도 역임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오랜 동안 늘 자신을 그저 ‘에드’로 불러달라고 했고, 직업 란에는 ‘양봉가’로 적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재산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작은 2층 집 한 채가 전부였다.

에드먼드 경은 에베레스트를 점령한 대담하고도 거친 정복자였지만, 그의 겸손하고 따뜻한 박애정신은 천사와 같았다.

그는 재산으로 초라한 집 한 채만을 남겼지만, 그가 인류에게 남긴 정신적 유산은 에베레스트 산보다도 더 높고 숭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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