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공신(功臣)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육신의 충절을 낳게 된 ‘계유정난’ 즉 수양대군 쿠데타에 얽힌 이야기 일 것이다. 특히 정변을 성공시킨 후 경덕궁 궁지기 노릇하다 일약 일등 정난공신으로 책록 돼 온갖 영화를 누린 칠삭둥이라던 한명회(韓明澮)의 족적이 조선왕조 역사에 뚜렷하게 남아있다.

또 연산군을 폐하고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박원종, 성희안 등을 주축으로 한 ‘정국공신’에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 때의 이귀, 김류 등으로 대표되는 ‘정사공신’이 이조시대 대표적 공신 그룹일 것이다. 그 외 숱한 공신 책록이 이루어졌지만 그 대부분이 당쟁의 산물 이었거나 전쟁 반란 진압의 포상 정도였다. 물론 이순신장군 같은 호국 영웅들을 그런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이렇게 옛 공신 책록은 대개가 정권 싸움에 목숨 걸었던 댓가이고 승자 쪽의 잔치였다. 현대 국가라고 해서 한 치 다를 것이 없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군이 한강 다리를 넘을 때 장교 이상 지휘부는 생명을 담보했었다. 실패하면 죽음 뿐 퇴로가 없다는 비장한 각오로 반정 대열을 이끈 군부 주체세력들 모습은 공포스러움의 자체로 나타났다.

쿠데타 성공 후 국민들이 서슬 퍼런 위압에 눌려 숨도 옳게 쉴 수 없는 형편에서 군사정권의 논공행상이 펼쳐졌다. 목숨 내놓았던 보상을 한 것이다. 그로부터 군사정권의 폐해가 심해지면서 급기야 이 땅은 민주화의 열망에 사로잡혔었다. 유명한 사쿠라 논쟁이 일어나고, 선명성 시비가 생기고, 김영삼 김대중 양 金의 민주화 투쟁이 절정을 이루면서 박정희 정권은 붕괴됐지만, 양 金의 분열로 전두환 쿠데타 정권에 이어 노태우 정권까지 군사정권은 12년 넘게 더 연장됐다. 따라서 양 金의 민주화 투쟁이 30년간이나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처럼 긴 세월을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양 金 곁에 있었던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가신(家臣)으로 불렀다. 국민은 그들이 주군을 대신해서 감옥도 가고 고문도 당한 것을 알기 때문에 가신으로 칭함이 온당찮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런 국민 생각 때문에 양 金이 차례로 집권한 후 두 가신 진영이 자연스럽게 공로를 인정받고 부상할 수 있었던 게다. 말하자면 그들의 공신 책록에 대한 국민 공감대가 형성됐던 것이다.

그 후 노무현 정권에서 나타난 것이 386측근이 어쩌고, 시민단체의 영향이 저쩌고, 하는 소위 대선 때의 선거판 공신들이었다. 이들 세력이 “우리 아니었으면 노무현 대통령 당선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고 설쳐대는 통에 나라꼴이 훨씬 더 가관이었다. 이렇게 보면 공신학의 정체성은 아주 뚜렷한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 창출에 공 있는 자들이 공신 책록의 중심이 됐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공 다툼이 일어나서 공신 숫자가 많아지면 그 많아진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떠안아야 될 몫이다. 그런 측면의 차기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 관심이 높다. 이명박 당선인의 핵심 실세라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새 정부의 공신 책록이 어디까지 이루어질지 모를 일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들 누구도 목숨 건 투쟁을 했거나 핍박을 받은 적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줄서기 잘한 온실 속 공로자들 뿐이란 점이 어째 국민보기에 좀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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