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함으로써 5년 만에 보수세력이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격동하는 내외 정세를 감안하면, 윤 정권의 앞날에 많은 난제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전임 정권이 실패한 경제, 안보, 외교 등 정책 전반의 교체가 거야(巨野)의 방해에 부딪쳐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한미동맹 강화에 따른 중국과의 관계조정 문제, 북한의 무력위협에 대응할 전략 등이 난제로 떠오른다.

정당은 항상 시대에 발맞추어 ‘자기 개혁’을 쉼 없이 할 때 진화하고 발전한다. 그런데 집권당이 된 국민의힘은 처절함이 부족하다. ‘보수 개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할 일은 많고 갈 길은 먼데,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개혁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개혁’이란 화두가 필요한 격변기 때마다 소환되는 개혁의 상징이다. 조광조의 개혁정치를 한마디로 말하면 유교적 이상정치와 도덕정치의 실현이다. 그러나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인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교훈을 조광조의 사례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림의 영수였던 조광조는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고, 성리학적 질서 회복이 시대적 요구로 떠오른 상황에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어지러운 세상을 바꾸려 했던 급진 개혁주의자로 필연적으로 시대와 충돌했고, 마침내 38세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한 유학의 태산북두이다.

조광조는 왜 실패했을까. 개혁의 주제와 방향, 속도를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조광조는 도교의 제천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를 혁파하고,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신들(정국공신靖國功臣)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인의 훈작을 삭제 (‘위훈삭제’)했으며, 천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해 사림 28명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백성들의 먹고사는 문제인 민생과는 상관없는 일종의 정치개혁에 해당하는 사안들을 밀어붙인 결과,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들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 이하 사림 70여 명(기묘명현己卯名賢)은 모두 사사(賜死)되었다.

조광조 일파는 ‘군자와 소인’이라는 개념을 강조했다. 훈구 세력은 조선의 병폐를 이끈 ‘소인’이고, 자신들 신진 사림은 ‘군자’이니 소인을 배격하고 군자가 정치를 주도하면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조광조는 유교의 지치주의(至治主義)에 기반을 둔 개혁정치를 주장하였지만 뜻을 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의 발전에 기여하였고, 역사는 조광조를 ‘시대를 앞서나간 개혁가’로 기억한다.

율곡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조광조 개혁의 실패 원인을, 그의 학문이 숙성되지 않았다는 점,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점,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찾고 있다. 율곡의 이 같은 지적은 오늘의 우리 정치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닐까?

더불어민주당이 2022년 3.9 대선에서 패배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자신들은 개혁세력인 ‘선(善)’이고, 국민의힘은 수구세력인 ‘적폐(積幣)’라는 ‘내로남불’ 의 이중 잣대에 국민이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육당 최남선은 ‘만고도목’(萬古都目, 뛰어난 역사 인물로서 정부요직에 안배)에서 검찰총장에 조광조를 추천했다. 시대를 초월하는 조광조의 ‘개혁정신’을 추모하는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愛君憂國在胸中(애군우국재흉중) 임금 사랑과 나라 걱정 마음이 가슴속에 있었지만

至治完成不世通(지치완성불세통) 이상정치 완성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꾸지 못했네

忠越時空身苦勞(충월시공신고로) 충성심은 시공을 넘어 몸이 괴롭고 수고로웠고

勇撑宇宙魄勳功(용탱우주백훈공) 용기는 우주를 지탱할 정도로 넋이 공훈을 남겼네

大儒動地千言發(대유동지천언발) 큰선비의 세상 움직임은 수만 사람의 말로 시작했고

巨木驚天一斫終(거목경천일작종) 하늘을 놀라게 한 큰 인물은 한번 베임으로 끝났네

失晶三光雲雨覆(실정삼광운우복)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고 구름과 비가 뒤집혔고

四民齊悼哭丹衷(사민제도곡단충) 온 백성이 모두 슬퍼해 (정암의) 붉은 충정에 곡하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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