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동·서양의 ‘문예부흥기’로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18세기 청나라 강건성세(康乾盛世, 강희·옹정·건륭 연간)를 들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는 8세기 석굴암·불국사로 상징되는 신라 경덕왕 때, 12세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고려 인종 때, 15세기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때, 18세기 영·정조 시대가 문예부흥기였다. 3~4백년을 주기로 문예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의 성공한 두 임금인 세종과 정조의 특징은 모두 자신의 ‘학문’이 깊었고, 학자를 존중하는 ‘지식경영’에 앞장섰고, 방대한 ‘독서가’라는 점이었다. 세종은 집현전,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인재를 양성하고 현자(賢者)를 가까이 두고 국가를 경영하였다. 특히 정조는 조선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弘齋全書홍제전서)을 남겼다(180권 100책).

개혁군주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을 계승했으며, 당쟁은 사색당파(四色黨派)에서 시파(時派)와 벽파(辟派)의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됐다. 영조 대에 외척 중심의 노론은 끝까지 벽파로 남았으며, 정조를 지지하였던 남인과 소론 그리고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했다.

정조는 정9품의 말단 벼슬아치인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 이가환(李家煥)과 내정·군사·외교 문제 등에 대해 토론(<정조실록>)할 정도로 소통에 능했지만, 만기친람(萬機親覽)하는 우를 범했다.

1781년(정조 5년), 규장각 제학 김종수가 ‘정조의 만기친람을 지적한 6개항’이 상소문에 나온다. “‘작은 일에 너무 신경 쓰시면 큰일에 소홀하기 쉽습니다. 크고 실한 것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눈앞의 일만 신경 쓰면 겉치레의 말단입니다….”(<홍재전서>)

정조의 리더십은 ‘군주민수(君舟民水,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로 정리된다. 백성은 임금을 떠받들지만, 임금이 잘못하면 끌어내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정조는 집권 후반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냇물(백성)은 만 개여도 거기에 비치는 달(임금)은 하나(만백성의 주인)로, 달이 작은 천은 작게 비추고 큰 강은 크게 비추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시대엔 많은 인재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면서 문예부흥을 이루었다. 정치에선 ‘금난전권’을 폐지한 번암 채제공, 문학에선 ‘열하일기’의 연암 박지원, 사상에선 ‘목민심서’의 다산 정약용, 미술에선 ‘풍속화’의 단원 김홍도가 나왔다.

정조는 49세라는 연부역강한 나이에 붕어했다. 그가 추진한 개혁이 만개하기도 전에. 만기친람 하는 ‘일중독’이 사망의 한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만약 정조가 수(壽)를 다해서 남인들과 함께 개혁정치를 이끌고 나갔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 역사상 ‘네 차례의 문예부흥기’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 건국 74년 동안 우리는 세계가 경탄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 이것을 ‘대한민국 문예부흥기’로 승화시킬 때에 비로소 선진화가 완성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전 후 과정에서 “연금개혁 등 박근혜 정부의 좋은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문화융성’을 국정목표로 삼아 추진했지만, 불법 탄핵으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윤 대통령은 정조대왕의 성공과 실패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기 바란다. 나아가 정조 시대의 문화·예술적 성취에서 ‘대한민국 르네상스’의 해답을 찾길 기대하는 뜻에서 필자의 정조대왕 추모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 냇물(백성)은 만개여도 달(임금)은 만백성의 주인이고

이세지자예지충(二歲知字叡智充) (정조가) 두 살 때 글자를 깨쳐 지혜가 충만했네

무당무편삼도순(無黨無偏三道順) 공정하여 당파에 치우치지 않아 나라가 순조로웠고

평평탕탕팔황홍(平平蕩蕩八荒洪) (정조의)탕평책을 승계·실시하여 온 세상이 넓어졌네

강기박람천심응(强記博覽天心應) 책을 많이 읽고 기억력이 강해 천심에 대응했고

물피다번횡액봉(勿避多煩橫厄逢) (국사에) 애쓰는 걸 피하지 않아 뜻밖의 액을 만났네

적덕누인천재경(積德累仁千載警) 덕과 인을 쌓은 것은 천년을 놀라게 할 업적이며

전서거질고금숭(全書巨帙古今崇) 홍제전서 한 질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숭상 받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