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온 국민이 독립운동과 한국전쟁에 희생한 선열(先烈)과 그 가족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는 달이다. 전쟁을 맞아 나라가 누란지위(累卵之危)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 중에는 의병(義兵)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011년 6월 1일.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이 경남 의령군에서 개최되었다. ‘호국보훈의 달’ 첫째 날인 6월 1일이 의병의 날로 선정된 이유는 임진왜란에 곽재우 장군이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에서 유래한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순국선열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고, 의병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인물이 임진 의병장들의 스승인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다.

남명은 조선의 선비들과는 아주 달랐다.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단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處士, 벼슬할 만한 실력을 갖추었으면서도 벼슬에 나가지 않은 선비)로 자처하면서 학문과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경상좌도에 퇴계(이황)가 있었다면, 경상우도에는 남명(조식)이 있어 영남 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동갑내기 두 사람은 편지로 교류했지만, 일생 동안 만나지는 못했다. 퇴계는 남명과의 관계에 대해, 얼굴은 보지 못하고 정신만으로 사귄다고 해서 ‘신교(神交)’라 표현했다.

남명은 외환(外患) 위기를 예상하여 제자들에게 유비무환의 정신을 가르쳤다. 남명 사후 20년 후에 발발한 임진왜란에 곽재우(의령), 정인홍(합천), 김면(고령) 3대 의병장 등 제자 57명, 사숙인 131명의 의병장들이 1만 여명의 경상우도 의병단을 이끌었다.

1555년, 남명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단성소)’에서 조정이 외척의 발호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드는 것에 대한 통렬한 지적을 했다. “(중략) 자전(慈殿,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일 뿐이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 고자(孤子, 고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백천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고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중략)” 퇴계는 이를 두고 “조식은 고항지사(高抗之士)다. 풍진(風塵)중에서도 절대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고 했다.

남명은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라는 시에서 ‘하늘이 울어도 지리산은 울지 않는다(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고 했는데, 선비의 높은 기상으로 속세와 타협하지 않고 만고불변의 지리산처럼 의연함을 지키고 싶다는 자신의 이상을 표현했다.

남명은 평생 경(敬)과 의(義)를 학문의 실천지표로 삼은 칼(敬義劍경의검)을 찬 선비였다. 칼 손잡이 앞뒤에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를 새겼다.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라는 뜻이다. 또한 남명은 허리춤에 방울(惺惺者성성자)을 달고 다녔다. 조금만 방울이 울려도 스스로를 경계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선비정신은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문화적인 자긍심이다. 지리산 천왕봉 아래 산천재(山天齋)에서 강학(講學)에만 전념한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인 조남명 선생의 선비정신을 흠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成林桃李滿三朝(성림도리만삼조) 제자들이 숲을 이룬 게 삼대의 조정에 이르렀고

佩劍雙鈴敬義標(패검쌍령경의표) 허리에 찬 칼과 한 쌍의 방울은 ‘경·의’ 표시였네

處士修行名利越(처사수행명리월) 선비(남명)의 수행은 명예와 이익을 뛰어넘었고

民兵蜂起死生超(의병봉기사생초) 의병(제자들)의 세찬 봉기는 죽음과 삶을 초월했네

弊端混混今封事(폐단혼혼금봉사) 폐단으로 사회풍조가 혼탁하면 바로 상소를 올렸고

塵土紛紛即思焦(진토분분즉사초) (마음속) 티끌이 어지러우면 곧 마음을 태워버렸네

避世子陵悠自適(피세자릉유자적) 세상을 피한 자릉(동한의 현자)처럼 유유자적했고

天王萬古卓然昭(천왕만고탁연소) 지리산 천왕봉처럼 만고에 높이 뛰어나게 빛나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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