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죽었다!
그의 ‘사망’ 기사가 오늘 아침 스포츠 신문의 머리를 장식했다. 순수를 지향하는 그가 가장 경멸했던 신문, 스포츠는 무슨 스포츠? 연예인 꽁무니나 핥고 다니는 옐로우, 아니 스칼렛 페이퍼라고 비난했던 신문, 그런 스포츠 신문 중에서도 다른 신문들과 달리 스무 살 처녀의 허리처럼 날렵한 판형에 나긋나긋한 종이로 인쇄한 신문, 그가 가장 혐오했던 그 신문에 독점적으로 실렸다. 

전라(全裸)의 여자가 헤벌쭉 웃고 있는 바로 옆자리에 실린 그의 사진. 세상의 번민을 다 짊어진 듯 무겁게 고뇌하는 그의 흑백 얼굴과, 복숭아 빛 화사한 살결을 다 드러내고 유두와 음부만 진분홍 하트 모양의 스티커로 살짝 가린 여자의 사진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사실, 내가 처음부터 그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 아이 아버지가 될 뻔했던 사람, 그런 사람을 죽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에 관한 진실을 처음 전해 들었을 때도 나는 믿지 않았다.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마디, 그 한 마디에 나는 살인을 결심했다. 

그 여자애가 내 아파트에 전화를 건 시각은 밤 1시였다.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여보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지훈 씨 이모님이시군요? 김치 담가 주러 오셨나 보죠? 제가 너무 일찍 전화 드렸죠? 오늘이 시작되고 한 시간밖에 안 지났으니까 말예요, 호호호.”

목소리가 앳되어 보였다. ‘일찍’이란 말의 ‘일’ 자에 유난히 힘을 주어 발음하는 데다, 끝말을 길게 끌어 애교와 응석을 얹으려는 어투만 갖고도 나보다 한참 신세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전시회 준비로 늦게까지 작업하다가 잠이 든 나로서는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가 못마땅하기만 했다. 게다가 어린 처녀가 그에게 ‘씨’라는 호칭을 붙이는 것도 불쾌했다. 하지만 내색을 할 수 없는 처지라 용건만 물었다. 

“지훈 씨랑 12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안 오는 거예요. 기다리다 지쳐서요, 혹시 약속을 잊었는가 싶어서 전화 걸어 본 거예요.”
여자애는 취기가 심해지는지 혀가 점점 꼬여 갔다.  
“아직 안 들어왔는데요.”

12시에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니, 밤 12시에 만나서 무얼 하겠다는 게야? 얘가 정신이 있는 애야, 없는 애야? 
나는 두 사람이 12시에 만나기로 했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모님, 그 사람 어쩌면 그래요? 번번이 약속을 어기고 그럴 수가 있는 거예요? 그 사람 본래 그런 사람인가요? 흑흑.”

저 혼자 괜히 호호거리던 여자애는 이번엔 제풀에 흐느꼈다. 
“이모님, 저 좀 만나 주세요. 오늘 밤 이대로 집에 돌아갔다가는 자살할 것만 같아요. 저 좀 만나 주세요, 네? 제가 택시 타고 바로 갈게요.”
여자애는 내가 집 위치를 알려 주지도 않았는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30분쯤 후에 내 아파트로 찾아왔다. 그러니까 새벽 1시 반에 온 것이었다. 
“저, 실례 좀 할게요.”

여자애는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주자 입에서 술 냄새를 풍기며 화장실부터 찾았다. 
“화장실은 저쪽...”
내가 화장실을 가리키려고 몸을 돌리는데, 여자애는 톡톡톡 뛰어가 화장실 문을 열고 벌써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쟤가 우리 집 화장실을 사용해 본 적이 있나? 금세 찾아들어가네. 
또 한 번 불쾌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찾아왔는지 궁금해 여자애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작가소개] 권경희는 한국 여류 추리작가이다. 1990년 장편소설 '저린 손끝'으로 제1회 김내성 추리문학상을 수상하고 문단에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 추리소설 '거울 없는 방', '물비늘', 실화소설 '트라이 앵글', 단편으로 '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등 수십 편이 있다. 수필집 '요설록', '흔들리는 삶을 위한 힌트'등이 있다. 중견 소설가이면서 상담심리 전문가로 <착한벗 심리상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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