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白巖) 박은식 선생은 <한국통사>에서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갈파했다.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광복 후 나라와 민족은 회복했지만, 역사는 완전히 되찾지 못했다.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조작하여 자국의 역사로 만들고 있는데, 우리의 주류 역사학계는 ‘있는 역사도 없다’라고 하는 ‘식민사관’의 맥을 광복 후부터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한국사를 바로 세워야 중국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는 법이다. 상고사를 연구하는 것은 우리의 ‘시원(始原)’을 연구하는 것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의 냉엄한 세계와 지정학 속에서 통일한국 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국가적·민족적 정체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

우리의 중・고등학교 교과서는 단군왕검의 실재(實在)를 모호하게 서술하고, 단군조선 2,000여 년의 역사를 공백으로 비워두고 있다. 하루빨리 왜곡된 우리 상고사와 단군조선에 대한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16년간(1922~1938년) 활동했는데, ‘조선사’의 뿌리를 없애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조선 전역과 만주의 역사 자료가 모두 거둬들여져 불태워 버려짐으로써 이후의 한국사는 상고사와 단군 관련 사료들이 완전히 고갈되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정도만 남게 되었다. 식민사관의 3대 원칙은 한민족의 역사는 ‘최대한 짧고(기간), 좁고(영토), 비루하게(내용)’ 기록한다는 것이었다.

최태영(崔泰永, 1900~2005)은 한국 법학계의 태두이자 우리 ‘상고사’ 복원에 큰 발자취를 남긴 대부이다, 1900년에 황해도 은율군에서 태어났다. 호가 없어서 ‘무호(無號)’ 선생이라고 불리었다.

7세에 국채보상 의연금 모집대회에서 강연자로 나섰고, 경신학교에서 장지영으로부터 역사를 배웠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도일하여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영미법철학을 전공하였다.

1924년부터 보성전문, 서울법대 등에서 헌법, 민법, 상법 등을 강의하며 우리나라 근대 법학의 태동기를 이끌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1947년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이 되었다.

77세의 노학자가 은퇴 후 고대사 연구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식민사관의 역사 날조 탈바가지를 깨기 위해서였다. 최태영의 역사관은 단군의 ‘고조선 개국’에서 우리 역사의 출발점을 보는 것으로, 위당(爲堂) 정인보와 궤를 같이한다.

1989년. 최태영은 두계(斗溪) 이병도를 3년 동안 설득한 끝에 조선총독부가 한국 상고사를 ‘신화’로 만들어 버린 단군조선의 역사가 ‘실재한 역사’라는 사실을 밝힌 <한국 상고사 입문>을 공동 출간했다.

“조선족은 B.C. 3000년쯤에 환국(桓國)으로부터 태백산에 이르러 북만주 송화강 연안지대에 정착하여 원주민의 일부와 융합하면서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발전하였다. 환웅(桓雄)까지의 오랫동안 신시(神市)시대를 거쳐서 단군이 조선이란 나라를 세우고 민족적 동방이동을 개시하였는데...”<동책 18쪽>

최태영을 사사(師事)한 최민자 성신여자대학교 교수는 “잃은 역사를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통일의 첩경이다.”라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최근 <한국학 코드>를 발간하여 한국학에 대한 심도 있는 화두(話頭)를 던지고 있다.

105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한국 상고사 복원을 위해 사력을 다한 무호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邦如形體史精神(방여형체사정신)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인데

中日虛張我不伸(중일허장아불신) 중·일은 역사를 날조했으나, 한국은 그러하지 않았네

發憤入門開闢闡(발분입문개벽천) (퇴임 후) 분발하여 역사에 입문, 개벽을 열었고

忘年講學始原新(망년강학시원신) 나이를 잊고 강학에 나서 민족 시원을 새롭게 했네

滿朝桓祖虛無像(만조환조허무상) 주류사학은 환웅을 신화상의 인물로 비정했지만

在野檀君實在人(재야단군실재인) 재야사학은 단군왕검을 실재인물로 규정했네

斗老低頭同意說(두노저두동의설) 이병도는 최태영의 학설에 동의해 머리를 숙였고

共編不朽一靑晨(공편불후일청신) 불후의 공저(상고사)는 오로지 푸른 새벽을 밝혔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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