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은 우리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부관참시, ‘관을 부수고 시체를 찢어놓는 형벌을 받은 사람으로 전해진다. 김옥균은 조선 말 개화사상가로 이름을 날렸다. 김옥균은 일본 사회의 계몽운동에 크게 감명받아 조선의 문을 활짝 열고자 했다. 서재필 등과 갑신정변을 주도했지만 실패했다.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암살을 당한 뒤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온전히 땅에 묻히지 못했다. 김옥균의 시신은 지금의 마포인 양화진에서 부관참시를 당했다.

당시 일본 신문은 김옥균이 관에서 꺼내지고 참시당하는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김옥균의 시신을 관에서 끄집어내 땅 위에 놓고 절단하기 쉽게 목과 손, 발밑에 나무판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다음 왼쪽 팔을 잘랐다. 이어 양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 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 열세 곳을 잘라 형벌을 마쳤다.” 김옥균의 시신은 팔도로 보내져 저잣거리에 내 걸렸다.

인류 역사에서 부관참시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종종 벌어졌다.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살던 오자서의 복수극은 유명하다. 오자서는 초나라 왕에게 일족을 몰살당하고 망명해 복수의 칼을 갈았다. 오나라 군대의 선봉장이 되어 초나라를 침공했지만, 원수는 이미 죽어 묻힌 뒤였다. 오자서는 분을 참지 못하고 원수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 속의 시신을 꺼내 채찍질했다. 오자서 이후로 부관참시가 형벌로 자리잡혔다.

17세기 영국의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의 목은 사후에도 300년을 외국에서 떠돌았다. 크롬웰은 권력투쟁 과정에서 영국 왕인 찰스 1세의 목을 치고, 영국 역사상 유일한 공화정부를 세웠다. 반대파를 잔인하게 진압하고, 공포정치를 일삼다 말년에 왕이 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진 못하고 죽었다. 크롬웰 사후, 목이 잘렸던 왕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크롬웰은 무덤에서 꺼내졌다. 그때 잘린 목은 썩지도 않고 세상을 떠돌다 1960년에야 영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부관참시는 잔인한 형벌이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겐 부질없는 짓이다. 시체를 자르고 찢어버린들 죽은 사람이 아픔을 느낄 리가 없으니, 부관참시는 보고 들을 산 사람들에게 내리는 형벌이다. 김옥균을 민비가, 초나라 왕을 오자서가, 크롬웰을 찰스 2세가 부관참시해서 얻은 것은 대중의 공포였다. 그들은 부관참시로 대중의 공포를 불러일으켜 누구도 넘보지 못할 권력의 탑을 쌓고자 했다.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도 부관참시가 한창이다. 현대 한국에서 벌어지는 부관참시는 관 뚜껑을 열지도, 시체를 찢지도 않는다. 단지 한 사람의 인생을 끄집어내 모욕주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외진 곳에 던져 놓는다. 독립영웅인 홍범도 장군을 소련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한 공산주의자라고 육군사관학교에서 흉상을 치우고, 홍범도함으로 명명한 해군함정의 이름을 바꾸고, 수여한 훈장을 취소하려 할 뿐이다.

윤석열 정부는 홍범도 장군 흉상을 독립기념관 수장고로 보내버리고, 김좌진, 이회영, 지청천, 이범석을 육사 교정 구석으로 치워버린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들이 치를 떨었던 홍범도 장군을 비롯한 독립영웅들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속내를 헤아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권력을 짧고 역사는 길다는 것. 윤석열 정부에서 쫓겨난 독립영웅들은 일본군에 쫓겨 고국을 등졌다 조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처럼, 반드시 돌아올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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