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한다. 어느 나라나 그 나라를 대표하는 ‘민족적 정서’가 있는데, 우리의 경우에는 잦은 외침(外侵)과 혼란한 국정(國政)으로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형성된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한(情恨)을 의미한다.

한민족의 고유 정서로는 ‘한(恨)’과 ‘흥(興)’을 꼽을 수 있다. 백제 가요 <정읍사>, 고려 가요 <가시리>, 조선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에는 떠난 임에 대해 원망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한(恨)의 정서가 있다. <아리랑>이나 <K-POP>은 한이 승화시킨 흥(興)이 아닐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족시인으로는 한민족의 전통적인 한(恨)의 정서를 민요적 율격으로 노래한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이 단연 선두에 꼽힌다. 그는 ‘조국 상실의 시대’에 인간성 회복을 오롯이 호소했고, <진달래꽃>이나 <먼 후일> 등에서 ‘이별의 정한’을 자신만의 색채와 목소리로 담담하게 노래했다.

소월의 시는 심오했지만, 삶은 기구했다. 그의 기구함은 사후에도 마찬가지다. 우리 민족 최고의 사랑시로 ‘애이불비(哀而不悲)’를 노래한 <진달래꽃>의 시인이지만, 그를 기리는 문학관 하나가 없다. 더군다나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의 고장은 대를 이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독재자에 의해 핵기지로 유린되고 있다.

소월은 1902년 9월 7일 평북 구성에서 김성도(金性燾)와 장경숙(張景淑)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공주, 본명은 정식(廷湜)이다.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부설하던 일본인들에게 폭행당하여 정신병을 앓게 되어, 광산업을 하던 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오산학교에 입학하면서 안서(岸曙) 김억을 스승으로 모시고 시작(詩作)을 배웠으며, 고당(古堂) 조만식(교장)의 가르침을 받으며 민족의식을 형성했다. 15세(1916)에 조부 친구의 딸인 홍단실과 결혼하였고, 18세에 <창조>에 ‘낭인(浪人)의 봄’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오산학교가 3·1운동 직후 한때 폐교되자 배재학당에 편입, 졸업하였다(1923년). 이후 일본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소월의 시작 활동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을 내고, 1925년 5월 <개벽>에 시론 ‘시혼(詩魂)’을 발표함으로써 절정에 이르렀다. 이 시집에는 126편의 작품이 수록되었고, 한국 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한다.

7·5조의 정형률과 3음보의 율격을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정한(情恨)을 노래한 소월은 생에 대한 깨달음과 사랑의 원리를 표출하였다.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표현함으로써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하였다. 후기 시에서는 삶의 고뇌를 노래하는 현실 인식과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게 부각된다.

1934년 12월. 소월은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다 실패하고, 극도의 빈곤에 의한 심한 염세증으로 술과 아편에 의지하다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에게 죽기 이틀 전 “여보, 세상은 참 살기 힘든 것 같구려!” 라면서 우울해했다고 전해진다.

김동인은 <내가 본 시인 김소월 군을 논함>이라는 조선일보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소월을 극찬했다. “그(소월)가 조선말을 다루는 솜씨가 ‘마치 자기가 조선말을 발명한 듯이’ 자유자재이고, 조선 사람의 감정을 알고 시로 표현한 것이 처음이다.”

소월은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 생활 동안 154편의 시를 남겼다. 한국 가곡의 20%가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1981년 예술 분야에서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 시절, 32세의 짧은 생을 불꽃같이 살다 간 위대한 천재시인, 소월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寧邊滿發藥山花(영변만발약산화) 영변의 약산에 흐드러지게 만발한 진달래꽃

歲歲年年追慕加(세세연연추모가) 해마다 (소월을) 추모하는 마음 더하네

岸曙敎鞭靈感動(안서교편영감동) 김억을 스승으로 삼아 시 짓기를 배웠고

古堂門下知性葩(고당문하지성파) 조만식의 문하에서 민족 지성을 꽃피웠네

四三克服歌謠調(사삼극복가요조) 4·3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민요조를 확립했고

七五傳承律格誇(칠오전승율격과) 7·5조의 정형률을 이어받아 율격을 뽐내었네

而立平生吾道險(이입평생오도험) 삼십 평생 예술의 도를 이루기 험난했지만

嗚呼進達每春華(오호진달매춘화) 아! 진달래꽃은 매년 봄이 오면 피는구나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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