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가 교내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을 외부로 이전하는 방침에 대해 찬반 논쟁이 격렬하다. 100년 전(1920년 6월) 만주에서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이 일본군 1개 대대를 무찌른(일본군 157명 사살, 300여 명 부상) ‘봉오동전투’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전쟁 사상 첫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넉 달 뒤인 1920년 10월 21~26일, 김좌진(金佐鎭, 1889~1930) 장군은 홍범도 장군 등과 화룡현 청산리(靑山里) 80리 계곡 백운평·천수평·완루구 등지에서 일본군 5천여 명을 맞아 10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한국 무장 독립전쟁 사상 가장 빛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일본군은 약 1,200명이 전사하고 200명이 부상했지만, 독립군은 60명의 전사자와 90명의 부상자만 발생하였다. 김일성이 역사적인 항일 승리 전투라고 선전하는 ‘보천보전투(普天堡戰鬪, 1937년)’와는 차원이 다른 대승이었다.

김좌진은 1889년 충남 홍성에서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명문대가 집안 출신으로,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인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어릴 적에 한학을 수학한 후 16세에 상경하여 17세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 19세에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장교로 임관했다.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된 후 귀향해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계몽운동에 적극 나섰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북간도에 독립군 양성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에 나섰다가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13년에 출옥하였다.

1915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8명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대한정의단을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일본군은 1921년 4월까지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 초토화계획’이란 이름의 독립군 근거지 소탕작전에 나섰다. 일본군은 한인 3,700여 명을 살육하고, 한인촌 가옥 3,500여 채 등을 초토화한 ‘간도참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한국 독립운동의 흑역사인 ‘자유시사변’은 한국 독립군을 러시아 적군 산하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내분이었다. 1921년 6월 28일, 적군과 그들 편에 선 한국인 공산주의자 집단이 자유시 외곽에서 한국 독립군을 포위 공격하여 독립군 1,700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강제 노역형에 처해졌다. 홍범도는 자유시사변 3개월 전 이미 무장해제를 주도한 적군의 한인 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역사적 사실이 ‘홍범도 흉상 이전’의 실마리가 된 것이다.

자유시사변으로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군은 사실상 궤멸하였다. 자유시로 들어가려던 백야는 러시아 적군의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이범석 등과 다시 만주로 돌아가 ‘신민부’ 설립에 참여했다. 이 와중에 백야의 독립군 부대는 마을 주민에게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징수했고, 징병제·둔전제를 시행하면서 민심이 크게 돌아섰다.

1930년 1월 24일. 백야는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공산당원 박상실의 흉탄을 맞아 향년 42세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아들 김두한과 손녀 김을동이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항일 독립전쟁 사상 가장 빛나는 승전으로 한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안겨준 백야 장군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危邦憂客轉憂思(위방우객전우사) 위태로운 나라 애국지사가 (이국에서) 나라 걱정하고

槿域三千海賊馳(근역삼천해적치) 무궁화 삼천리 강토 (국권 강탈한) 해적이 차지했네

月下磨刀常勝礎(월하마도상승초) 달 아래에서 칼을 갈아 상승의 주춧돌을 놓고

嶺上秣馬出兵基(영상말마출병기) 재 위에서 말을 먹여 출병의 기초를 닦았네

靑山大捷遺民悅(청산대첩유민열) 청산리대첩 승리하자 망한 나라 백성은 기뻐했고

自由風波獨立萎(자유풍파독립위) 자유시참변 무장해제로 독립군 활동은 시들어말랐네

不惑散花讐未報(불혹산화수미보) 나라의 원수를 되갚지 못하고 40세에 순국했으나

驚天動地萬人追(경천동지만인추) 세상을 놀라게 한 대첩 모든 국민이 추모하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