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은 일제 강점에서 벗어난 ‘광복의 원년’이지만, 오랜 식민 지배 끝에 폐허와 공허만 남은 한국 자본주의가 처음 열린 해이다.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는 태극기와 유엔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의 탄생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바탕으로 하는 나라로 방향을 잡았고, 6.25 남침전쟁 이후에는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대한민국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출범했으나 서울 시내에서는 수백 수천 명의 좌익과 우익이 돌을 집어 던지며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사가 일천한 대한민국에 홀연히 등장해 ‘한국 경제사’를 본격적으로 써 내려간 쌍두마차가 삼성을 일으킨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1910~1987)과 현대를 세운 아산(峨山) 정주영(1915~2001)이다. 

전 생애를 건 모험과 도전으로 전자·반도체 산업의 ‘성공 신화’를 이룬 호암은 1910년 경남 의령군에서 이찬우(경주 이씨, 천석꾼)와 권재림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26년 17세에 3살 연상의 박두을과 혼인했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하여 수학 중 심한 각기병으로 귀국하게 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기업을 통해 국가와 인류사회에 공헌하고 봉사한다.”는 뜻을 세운 스물일곱 살 청년은 아버지로부터 300석 소출의 토지를 분재(分財) 받아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세워 사업에 투신한 후, 1938년 3월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하였다.

1953∼1954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는데, 제일모직 완공식 땐 이승만 대통령이 방문해 ‘의피창생(衣被創生, 옷이 새로운 삶을 만든다)’이라는 휘호를 써주기도 했다. 1961년 8월 여타 대기업을 모아서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를 창립,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1964년 동양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과 1965년 중앙일보를 창설,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1969년 삼성전자를 설립하여 삼성그룹의 도약대를 만들었고, 1974년 삼성석유화학·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공업에 진출하였다.

호암은 일찍 기술의 가치에 눈을 떠 ‘경소단박(輕小短薄)’의 첨단기술만이 생존의 길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삼성전자의 탄생 뿌리가 여기서 시작된다. 1983년 3월. 호암은 ‘도쿄선언’으로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화했고, 메모리 시장을 장악한 후 이건희 회장 대에 이르러선 미국, 일본을 차례로 추월하고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글로벌기업으로 꽃피우게 된다.

호암의 기업가정신을 설명하는 세 축은 바로 ‘사업보국(事業報國)’ ‘인재제일(人材第一)’ ‘합리추구(合理追求)’다. 이러한 경영이념으로 호암은 대한민국 경제 국부(國父)로도 평가받고 있다. 오피니언 리더와 전문경영인(CEO)을 대상으로 한국에 필요한 ‘21세기형 CEO상이 누구인가?’를 설문한 조사에선 늘 호암이 1위로 뽑힌다.

호암은 호암미술관을 건립하였고, 국악과 서예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저서에 <우리가 잘사는 길> <호암자전> 등이 있다.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시대를 선도하는 통찰력의 기업가정신, ‘이병철 리더십’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기업의 과제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초일류 삼성의 신화를 이룩한 ‘한국경제의 기수’ 호암 선생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破天奇跡我東更(파천기적아동경) 기적을 처음으로 해내 우리나라 경제를 새롭게 했고

創業三星四海明(창업삼성사해명) 삼성그룹을 창업하여 온 천하를 밝혔네

衣被成新生活變(의피성신생활변) 의복이 새로운 삶을 만들어 생활을 변화시켰고

言論設立目標正(언론설립목표정) 언론 방송사를 설립하여 사시(社是)를 바로 세웠네

輕些短薄存亡核(경사단박존망핵) 가볍고 작고 짧으며 얇은 것이 기업 존망의 핵이며

重化尖端發展行(중화첨단발전행) 중화학공업과 첨단산업이 발전의 길이라 믿었네

報國精神千古訓(보국정신천고훈) 기업보국 정신은 천고의(영원한) 가르침이고

是翁矍鑠萬邦迎(시옹확삭만방영) 늙었어도 재빠른 이 노인을 모든 나라가 맞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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