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11월29일 100세로 별세했다. 독일에서 1923년 5월27일 고등학교 교사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돌프 히틀러 지배하에서 유태인이란 이유로 직장을 잃자 키신저가 15세 때 미국으로 이민했다. 키신저는 2차 세계대전중 이 던 1943년 징집되어 독일 점령지의 통역관으로 복무했다. 여기서 그는 나치 대원들을 찾아내는데 공을 세워 청동무공훈장을 받았다.

제대 후 키신저는 하버드 대학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논문은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메테르니히(1773-1859년)의 현실주의 외교에 관해 썼다. 메테르니히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몰락 후 유럽 열강들의 왕정복고 시대에 세력균형 외교를 펼쳐 주도권을 잡았다. 1815~1848년을 ‘메테르니히 시대’라고 할 정도로 그의 세력균형 외교는 성공했다. 키신저도 메테르니히의 현실주의에 바탕한 세력균형 외교를 따랐다.

키신저는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었고 1973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국무장관으로 발탁되었다. 1969~1977년 사이 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으로 미국 외교를 8년 간 지휘하였다. 퇴임 후 ‘키신저 연합’ 국제문제 자문회사를 설립, 100세 때까지 많은 나라들의 외교자문을 맡았다. 중국에는 100 차례나 드나들었다.

키신저가 남긴 외교적 업적으로는 공산 폐쇄 중공(Red China)과의 관계개선, 공산 월맹과의 ‘파리 평화협정’, 소련과의 핵무기제한 협정 등을 꼽는다. 그는 1971년 7월 극비리에 중공을 방문,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미-중 관계개선의 길을 텄다. 그는 대만을 유엔에서 1971년 10월 축출하고 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길을 열었다. 세계적으로 고립 무원했던 중국을 국제무대로 끌어내 오늘의 세계 2대 경제 대국으로 발돋움케 하였다. 그래서 키진저가 별세하자 시진핑 중국 주석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조의를 표했을 정도였고 중국 관영매체는 그를 ‘중국의 오랜 친구’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대만 언론은 키신저를 ‘중국 대변인이 됐던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키신저는 1971년 방중 당시 저우언라이와의 회담에서 미국이 결국 대만을 포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키진저는 1973년 공산 월맹과 파리에서 협상해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키고 주월미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그는 미•월맹 파리협정으로 ‘영예로운 평화’를 달성했다고 자찬했다.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도 탔다. 하지만 월맹은 2년 후 평화통일을 약속한 미•월맹 파리 협정을 짓밟고 월남을 무력으로 점령, 적화 통일했다. 

키신저는 중공을 개방시켰고 미•월맹 파리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외교의 귀재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개방의 길로 끌어낸 중국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적대 국가로 맞서게 되었다. 또한 그가 ‘영예로운 평화’라고 자찬했던 미•월맹 파리 평화협정은 주월미군 철수와 월맹의 월남 적화의 길을 터 주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재임 기간 키신저가 벌려놓은 국제관계를 바로 잡는데 많은 시간을 소모했다고 불평하기에 이르렀다. 한 전직 외교관은 키신저가 “교란만 했을 뿐 건설은 하지 못했다”라고 비판했다.

키신저는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옹호하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전통적인 미국 이상주의 외교를 외면한 채 오직 목표 달성을 위해 극단적 현실주의 외교에 집착했다. 그는 중공과 관계개선 돌파구를 뚫기 위해 자유 대만을 볼모로 삼았고 월남에서의 미군철수를 위해 자유 월남을 희생양으로 바쳤다. 성급하고 교만한 성격의 키진저는 주변인들에게 불신과 경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는 외교의 귀재 찬사를 받았지만 근시안적이며 잔혹한 조작 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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