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공직선거후보자검증위원회는 이재명 대표의 전 특보 정의찬 씨를 1997년 ‘고문치사’ 사건 연루 사유로 공천불가 판정을 내렸다. 정 특보에 대한 공천불과 판정을 계기로 운동권 대학생들의 ‘고문치사’와 경찰의 ‘고문치사’ 사건이 겹쳐 보인다. 경찰에 의한 학생 고문치사는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았고 지금 까지 희생자 추모가 이어지고 있데 반해, 운동권에 의한 민간인 고문치사는 가볍게 넘어갔고 곧 잊혔다.

서울대 학생 박종철 씨는 1987년 1월4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압송되었다. 거기서 그는 물고문으로 질식해 의식을 잃었고 4주 후에 사망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은 박 씨 사망에 대해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며 거짓 말해 국민의 분노를 더 샀다. 박종철 고문치사는 국민들의 반정시위를 증폭시켰다.

그로부터 5개월 만에 경찰 최루탄에 의한 학생사망 사건이 뒤따랐다. 이한열 연세대 학생은 1987년 6월9일 교정 앞 차도 시위에 참가하던 중 경찰의 최루탄에 두개골이 파열돼 4주 만에 사망했다. 박종철에 이은 이한열 사망은 국민들의 ‘6월 항쟁’ 기폭제가 되었고 노태우 대통령의 ‘6.29 선언’으로 이어져 군정종식의 계기가 되었다. ‘이한열 기념관’도 건립되었다.

그러나 박*이 사망을 전후해 발생한 운동권 학생들의 민간 고문치사 사건들은 곧 잊혀졌고 그들의 참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1984년 9월 서울대 운동권 학생들은 민간인 4명을 감금해 최대 6일 동안 폭행했다. 이 학생들은 그들을 ‘경찰 프락치(비밀로 활동하는 정보원)로 몰아 참혹한 고문을 자행했다. 전기동 씨는 방송통신대 학생이라고 밝혔고 교수에 의해 방통대 학생임이 확인되었는데도 계속 폭행당했다. 유시민 전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으로서 그 폭행 사건으로 1심에서 1년6월의 징역형을 받았다. 사법당국은 폭행당한 4명이 모두 프락치가 아니라고 판결했다.

1989년 10월 전국대학총학생대표협의회(전대협) 소속의 연세대와 고려대 운동권 학생들은 동양공업전문대학(현 동양미래대) 학생인 설인종 씨를 안기부 프락치로 몰며 구타, 정신을 잃으면 물을 끼얹어 깨우고 계속 폭행해 숨지게 했다. 또 1997년 5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간부들은 전남대에서 민간인 이종권 씨를 경찰 프락치로 몰아 쇠파이프 등으로 구타, 숨지게 했다. 그 밖에도 한총련 간부들은 1997년 선반기능공 이석 씨를 한양대에서 경찰 프락치로 의심, 폭행해 숨지게 했다. 민주당에 의해 공천 불가 판정을 받은 정의찬 특보는 이종권 씨 타살사건과 관련돼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복역했다.

이처럼 1980-90년대 터져 나온 경찰의 학생 고문치사와 운동권 학생들의 민간인 고문치사에는 공통점이 있다. 경찰과 학생이 참혹한 고문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경찰에 의해 죽임 당한 학생들은 국가적 영웅으로 오늘날까지 추모되고 있는데 반해, 운동권에 의해 고문 치사당한 민간인들은 곧 잊히고 말았다. 4년제 대학생의 생명과 기능공의 생명은 모두 다 같이 소중하다. 다만 정치적 측면에선 민주화 시위로 생명을 잃은 대학생은 민주투사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에 의해 고문치사당한 민간인들을 가볍게 넘겨서는 아니 된다. 야만적인 고문에 의해 풋풋한 생명을 잃었다는 데서는 다 똑 같다는 데서 그렇다. 물론 학생들에 의해 고문치사당한 젊은이들을 민주화 시위에 나섰던 학생들과 똑같이 영웅시 하자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죄 없이 학생 운동권에 의해 타살된 젊은이들의 참상도 결코 가볍게 잊혀져선 아니 된다. 그런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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