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이다. 밤새 눈이 내렸다. 여의도공원으로 간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앞에서 내렸다. 윤중로를 따라 늘어선 벚나무도 눈을 이고 있다. 윤중로 인도는 눈 발자국 투성이다. 발자국을 지우며 여의도공원으로 걸었다. 앞서간 사람에게 보내는 시샘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원으로 들어섰다. 조금 전의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이 펼쳐졌다. 채를 친 밀가루를 뿌려놓은 듯 곱다. 나이를 잊는다.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여의도공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여의도공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 자연생태 숲, 문화마당, 잔디마당, 한국전통 숲 4개 테마
고려시대 말사육장->군용비행장->5.16광장에서 시민공원으로

여의도공원 산책길이다. 처음 만난 산책길은 한국 전통의 숲에 있는 아담길이다. 눈이 덮여있지만 여의도공원은 계획대로 설계된 공원임을 직감할 수 있다. 자연생태의 숲, 문화의 마당, 잔디마당, 한국 전통의 숲 등 4개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각 테마에는 숲을 품은 정원’ ‘8201’ ‘소풍 색감’ ‘아빠의 언어’ ‘EAT Together’ ‘한강에 돌을 던지다’ ‘LET IT BEE’ 등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테마 정원이 꾸며져 있다. 특히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에는 6km의 산책로가 놓여 있다. 여의동 샛강 생태공원은 국내 최초로 1997925일 여의도역 지하 용수로 활용한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있다.

조순 서울시장 시절 19991월 개장

아담길산책길은 눈 속에 숨어버렸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만났다. 레고로 만든 어린왕자다. 어린왕자의 황금빛 머리 위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어린왕자는 머플러를 휘날리며 별을 들고 서 있다. 그가 필자에게 말을 전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라고. ‘마음으로 봐야 한다라는 얘기다. 새삼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여의도공원이 마음으로 전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의도공원은 19991월 개장했다. 조순 전 서울시장 때다. 25년 세월을 겪었다. 반반 세기 동안 자란 여의도공원의 숲은 여의도의 과거를 묻었다. 여의도는 하중도(河中島). 한강은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젖줄이다. 젖줄 한 가운데 자리 잡은 보석 같은 섬이 바로 여의도다. 한강 물이 불어나면 여의도 주변에 광활한 모래톱이 생겼다. 모래톱이 밤섬에서 양말산(지금의 국회의사당 자리)까지 이어졌다. 넓은 섬이 됐다. 그래서 너벌섬’(넓은 섬이라는 뜻)이라고 불렸다. 너무 넓어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 필요 없는 섬이 됐다. 그래서 너나 가지라는 의미로 너의섬으로 이름이 굳어졌다. 여의도는 너의 섬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아주 옛날 이곳은 버려진 넓은 땅이었다. 그나마 여의도가 제자리를 찾은 것은 고려시대다. 고려시대에는 말의 사육장으로 쓰였다. 말을 도망가지 못하기 위해서 이곳을 방목장으로 삼은 거다. 조선시대에는 방목지로 이용했다. 우리나라의 정치, 금융, 방송의 중심지가 한 때 쓸모없는 섬으로 불렸다는 게 흥미롭다. 하늘을 봤다. 고층빌딩은 눈 온 뒤의 새파란 하늘을 뚫을 듯 쏟아있다. 격세지감이다.

쓸모없는 섬에서 정치.금융.방송의 중심지

공군창군 60주년 기념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공군창군 60주년 기념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C-47.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C-47.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여의도는 일제강점기 때인 1916년부터 군용비행장으로 이용했다. 1922경성비행장이란 공식 이름을 얻었다. 국제 여객과 우편 업무를 처리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이 만주와 일본을 잇는 중간 기착지이자 군사시설로 경성비행장을 활용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사람 누구도 여의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의도가 우리에게 다가온 사건이 있다. 최초의 한국 비행사인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이었다. 19221210일 일이다. 대한제국인으로 유일한 도쿄 오쿠리 비행학교 졸업자인 그가 경성 항공을 두 차례 비행했다. 독립의 염원을 안고 식민지의 하늘을 날았다. 경성 시민에게는 독립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여의도는 광복 이후에도 비행기와 인연을 이어갔다. 광복 후 1954년 군용비행장을 겸한 국제공항으로 개장했다. 여의도 비행장에서 대한민국 공군의 전신인 국방경비행 항공부대가 결성됐다. 우리나라 공군의 출발점인 셈이다.

여의도 비행장 대한민국공군 전신 항공부대결성

이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녹지 공원을 빠져나오면 광장이 나온다. 한편에 국기게양대가 있다. 19988월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설치했다. 높이가 무려 50m. 그 옆에는 C-47특별전시관이 있다. 국내 유일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 공간이다. C-47이 놓여 있는 곳은 1945818일 한국광복군 정진대(이범석, 장준하, 노능서, 김준엽)를 태우고 미국 SOS부대와 함께 착륙한 위치다. C-47 뒤로는 공군 창군 60주년 기념탑도 있다. 기념탑이 있는 곳은 대한민국 공군 최초 비행단이 위치했던 곳이란다.

여의도공원에서 만난 어린왕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여의도공원에서 만난 어린왕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여의도공원의 개장 직전 이곳은 5·16광장이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말 그대로 광장이었다. 그 규모도 엄청났다. 12만 평이나 됐다. 5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필자도 5·16광장에 서본 기억이 있다. 반공 집회였는데 전교생이 참여했다. 박정희 정권의 관제 집회에 동원된 것이다. 5·16광장은 주로 체제 과시 용도로 사용됐다. 한때 이곳에는 B-29폭격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B-29폭격기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큰 폭격기이다. 일본 나가사키에 핵폭격을 시행한 폭격기다. 하지만 광장은 시민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던 휴식처가 됐다. 마치 놀이공원 같은 광장이었다.

여의도의 변화는 드라마틱하다. 1966년 당시 여의도 윤중제를 축조했다. 여의도 개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여의도 건설을 위해 밤섬 골재를 이용했다. 평지를 만들고 택지개발을 했다. 1971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층 아파트(12)도 들어섰다. 이어 80년 한강종합개발사업과 함께 국회의사당, KBS, 한국거래소가 들어섰다. 동양의 최고 고층 빌딩인 63빌딩(1985년 당시)도 건축됐다. 한국의 맨해튼으로 변모해갔다.

선유도 다리에서 본 한강 풍경 장관

선유도 공원 안내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선유도 공원 안내판.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공원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공원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여의도 환승센터에서 선유도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당산철교 중간에 선유도공원이 있다. 버스에서 내리자 선유도를 이어주는 주황색 다리가 나왔다. 다리는 선유도공원의 한 부분 같았다. 선유도를 건너는 다리에서 본 한강은 말 그대로 환상이다. 시간은 멈추게 하고 싶다. 아니 내가 석고가 되어 한강의 풍경을 바라본다. 도시를 가로질러 한강에 반사된 햇볕이 눈을 부시다. 도도히 흐르는 한강 강변으로는 정렬한 아파트가 한강을 둘러쌓고 있는 듯하다.

선유도 안으로 들어가자 메타세쿼이아가 시원스럽게 뻗어 있다. 메타세쿼이아 길을 따라가다 보면 낡은 콘크리트 벽과 기둥이 드러나 있다. 정수장 시설물이다. 온실과 수질정화원, 환경계류 시설 등이 보인다. 곧 테크 길이 나오는데 그곳은 바로 수생식물원이다. 눈이 덮여있어서 어떤 식물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은 옛날 정화시설로 보인다. 이 밖에도 곳곳에 정화시설물의 잔재를 볼 있다.

선유도공원은 정수장 구조물과 건물을 재활용하여 자연환경 공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폐정수장에서 친환경 생태공원으로 변신한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모습을 고스란히 남겨뒀다.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낡은 것을 뜯어내거나 새로 꾸미지 않았다.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과 역사가 숨 쉬는 공원인 셈이다.

홍수로 사라진 한강 최고 명승지 선유봉

공원내 남아있는 정수시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공원내 남아있는 정수시설.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선유도에서 바라본 한강.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선유도에서 바라본 한강.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메타세쿼이아 길 맨 안쪽에는 선유도 이야기라는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 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유입된 빗물을 한강으로 방류할 때 사용했던 빗물 방류 밸브다. 엄청나게 컸다. 또 예로부터 절경으로 사랑받은 선유도를 확인할 수도 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선유봉의 정취를 그린 작품, ‘선유봉을 볼 수 있다. 선유도가 아니라 선유봉?

그렇다. 선유도 한 가운데는 선유봉이 있었다. 선유봉이 사라진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선유도를 시새움 하듯 거센 풍랑이 몰아쳤다. 선유도 신선이 노니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만큼 아름다웠다. 한강의 최고 명승지 중 하나였다. 중국 사신들 사이에 조선에서 선유봉을 보지 못했다면 조선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전해졌을 정도. 그 아름다움은 20년대에 사라졌다. 1929년 을축대홍수를 겪고 난 뒤 홍수 예방을 위해 한강에 제방을 쌓았다. 이를 위해 아름다운 선유봉을 깨부쉈다. 아름다움이 사라진 뒤 선유도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나중에 선유도에 물 정화시설이 들어섰다. 1978년이다. 신선의 땅이 인공의 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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