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공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금천구 탐방인데 뜬금없이 구로공단타령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금천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리됐다. 분리되기 전인 1967년부터 1973년까지 구로공단이 만들어졌다. 구로공단은 금천구 가산동과 구로구 구로동에 3개가 있었다. 가산디지털단지가 바로 구로공단 단지 중 하나였다. 봉제, 가발, 완구, 전자 등 경공업 업체가 입주했다. 정부의 초기경제전략인 수출 공업화의 전진기지였다. 1970년대부터 효과가 나타났다. 고도성장의 엔진이 되었다. 한때 국내 총수출액의 10%를 차지했다. 낮은 임금에 야근과 철야까지 감내한 어린 여공의 피땀이 만든 성과였다.

순이의집과 가리봉 상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순이의집과 가리봉 상회.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가산디지털단지 구로공단 일부.,.어린여공 피땀어린 곳
 반유구화역 조선시대 역원, 육상 교통의 결절점

가산은 변화가 무쌍한 지역이다. ‘공단이란 이름은 디지털 단지로 바뀌었다. 가리봉은 가산으로 변했다. 외형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허름한 단층 공장은 공장형 빌딩이 됐다. 빌딩은 초현대식 마천루를 이루고 있다. 즐비한 유리 빌딩 속에 추억을 들춰낼 옛 흔적이 남아 있다. 구로 노동자생활관인 금천 순이의 집이다. 구로공단의 역사이자 산업화의 역군인 여성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재현한 체험관이다. ‘순이는 당시 모든 여공의 이름인 셈이다.

구로공단 역사이자 산업화 흔적 순이의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지난 15일 친숙한 이름, ‘순이를 찾아 나섰다. 지하철 1호선 가산디지털단지역에 내렸다. 오른편은 거대한 빌딩 숲이다. 왼편으로 낡은 주택가다. 주택가 골목은 좁았다. 집들이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옛날에 노동자의 숙소로 쓰인 벌집일지도 모른다. 골목을 헤매다가 낯선 상점하나가 보였다. ‘가리봉상회. 영락없는 1960~70년대식의 점포다. 그렇다. ‘순이의 집이었다. 가리봉상회와 이어진 순이의 집2층 빨간 벽돌 빌라다.

순이의 집을 들어섰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반지하에 있는 쪽방체험관이다. 통로는 좁다. 두 사람이 지나면 어깨가 맞닿을 지경이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지하통로를 따라 좌우로 3개씩 방이 늘어서 있다. ‘쪽방이다. 각 방은 생활방’, ‘문화방’, ‘공부방’, ‘추억방’, ‘패션방’, ‘봉제방으로 꾸며져 있다. 간단한 생활 도구로 각 방의 특징을 살리고 있다. 아무리 넓게 봐도 두 평은 되지 않을 듯하다. 한 사람이 기거하기에도 좁은 공간이다. 이곳에 적게는 두세 명, 많게는 너덧 명이 살았다. 칼잠을 자기도 비좁았다. 숨이 막힌다. ‘공부방에 들어가 앉았다. 옛날 중·고교 교과서와 공책 등이 밥상 위에 놓여 있다. 끈으로 동여매 만든 공책을 폈다. 줄이 어긋난 글씨가 곳곳에 보였다. 졸음과 맞선 흔적이다. 아니 고난 속에서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사투였을지도 모른다.

쪽방체험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쪽방체험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6~70년대 칼잠 자던 쪽방. “그때는 그랬지절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필자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1960-70년대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때는 그랬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필자와 또래인 순이도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나의 추억과 다르지 않다. 필자도 공사장에서 데모도를 했다. 무거운 벽돌을 지고 3, 4층 건물 계단을 올랐다. 동병상련일까. 어깨에 무거운 압력이 느껴진다. ‘순이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노동자생활체험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노동자생활체험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1960~70년대 구로공단엔 나이 든 순이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나선 상경 소녀였다. 순이는 구로공단으로 모여들었다. 공장 노동자를 위한 주거지가 형성됐다. ‘순이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노동의 대가는 월급은 6~8만 원이 전부다. 쪽방 월세는 무려 4~5만 원이다. ‘쪽방조차 독차지할 수 없었다. 끼리끼리 모여 쪽방을 하나 빌려 썼다. ‘쪽방을 빌려주는 집을 벌집혹은 닭장집이라고 했다. 닭장처럼 빼곡히 붙어 있다고 그렇게 불렀다. ‘

순이의 집이 바로 그들의 일상을 재현한 벌집이다. 아마 중고교 학생이 순이의 집을 본다면 매우 진귀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지금도 어디엔가 쪽방은 있다는 말을 믿지 않을 거다. 하지만 현실이다. 완전히 사라진 과거가 아니다. 가산디지털단지의 초고층 빌딩으로 가려진 어디엔가 가난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가리봉 상회...7~80년대 전방 판박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1층 전시실로 올라갔다. 1층은 부대시설을 갖추지 못한 주거환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공동세면장과 공중화장실, 방과 부엌이 있다. 이곳에서 이뤄지던 생활 모습을 미니어처로 표현했다. 화장실 앞의 줄, 북적이는 세면장의 모습이 생동감이 느껴진다. 사실 수십 명이 사는 벌집에는 세면장과 화장실이 하나뿐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남녀 구분 없는 화장실에서 줄을 서야 했다. 이런 풍경은 단지 벌집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서울 변두리의 판자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가리봉상회로 갔다. 1970~80년대 골목길에서 흔히 보이던 전방이다. 그 당시에는 점포를 전방이라고 했다. 점방은 지금의 대형 슈퍼마켓보다 많은 역할을 했다. 우선 없는 게 없다. 식료품에서 학용품까지 모든 건 갖추고 있었다. 미닫이문을 한 가리봉상회도 그랬다. 진열품은 모두가 추억이다. 재기, 구슬, 팽이, 종이 인형 등 어린이 놀이기구가 보였다. 달고나, 별사탕, 과자 같은 군것질거리도 있다. 빨간 돼지저금통, 성냥, 모기약, 고무줄, 양은 주전자, 부탄가스, 우산, 전화기 같은 공산품도 있다. 하나 같이 1960~80년대의 잇템이다. 벽면에는 영화 포스터도 붙어 있었다. 어린 시절 생각이 절로 났다. 전시만 할 게 아니라 상품 판매도 곁들인 가리봉상회로 꾸밀 수 없을까. 세대 교류의 현장이 될 수 있을 듯해서 하는 말이다.

순이의 집이 금천의 현대사를 상징한다면 말미고개에 있는 반유구화역터는 조선시대 역사의 현장이다. 시내버스를 타고 말미고개로 갔다. 말미고개는 정조가 화성행궁으로 가던 길이었다. 하지만 ‘50m대로(시흥대로)’를 닦으면서 말미고개 봉우리를 깎아내는 바람에 옛 모습은 사라졌다. 고개마루턱에서 내려오는 지세가 말과 비슷한 데서 유래된 이름으로 말뫼(馬山)고개라고도 했다. 얕은 고개지만 낮은 지대에서 보면 마치 말머리처럼 보였다 하여 말머리(馬頭)고개라고도 했다. ()과 말() 발음을 혼용하면서 두산(斗山)고개가 되기도 했다.

방유구화역터 조선시대의 역사의 현장

말미재. ​반유구화역유적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말미재. ​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말미고개는 조선시대의 역사와 문화 소통로였다. 조선시대의 9대 간선도로 중 하나다. 간선도로 곳곳에 설치했던 역참이 있던 곳이다. 그 이름만이 아니라 그 증거도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역원인 반유구화역다. 역원(驛院)30리마다 설치하여 공무를 집행하는 사람들의 숙소와 교통 등 편의 제공했다. 역은 말을 교환하는 장소이며, 원은 숙박을 하는 곳이다. 필자가 올 때 내렸던 건너편 말미고개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반유구화역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반유구화역터유적비가 서 있다. 버스정류장 옆에 유적비가 있는 게 우연은 아닌 듯하다.

반유구화역은 조선시대 육상 교통의 결절점이라고 할 수 있다. 표지석에 의하면 이 역참에는 찰방(6) 역승, 역장, 역리, 역노비 등을 두었다. 상등 말 1, 중등 말 4, 하등 말 2필 등 8필의 역마와 주변의 6개 역참을 관리했다. 역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말만 수급한 게 아니다.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치러가던 선비들이 이곳쯤에 와서 쉬면서 말에게 물과 여물을 먹였다. 사람이 모이는 역참 주변에는 마을이 있는 게 보통이다. 역원 취락이다. 말미고개도 마찬가지다. 말미마을이 있다. 지금은 금천소방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성공적인 도시재생을 이룬 마을로 이름이 나 있다.

반유구화역유적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반유구화역유적비.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향토사 현, 걷고 싶은 거리 유명 말미마을

사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고개 이름을 말미고개로 정한 것, 향토사를 발굴하고 연구해서 반유구화역을 찾고 그 유래비 건립한 것도 모두 지역 주민의 자발적 노력으로 이룬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말미마을은 걷고 싶은 마을 골목으로도 유명하단다. 생활문화와 역사를 접목한 그들의 지혜와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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