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일 밤 한파주의보가 내려졌다. 추위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몸조차 굳어지는 듯하다. 더 이상 게으름을 피울 수 없다. 느낌이다. 원고 마감을 앞둔 23일 오후 길을 나섰다. 최강의 한파란다. 세상이 냉동고가 된 추위를 핑계로 게으름을 피운 게 후회된다.

금나래중앙공원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금나래중앙공원 풍경,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 =김경은 여행작가
사진 =김경은 여행작가

- 국군 창군 최초 군단급 부대인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와 북침
- 흥선대원군 별장터와 강희맹 선생 표지석 주변..쓰레기장 방불안타까움

지하철 1호선 금천구청역에서 벚꽃로를 따라 걸었다. 금천구청역사와 연결로로 이어진 금나래중앙공원을 가는 길이다. 금나래중앙공원이 조성되기 전 이곳에는 1947729일 창설된 육군보병학교를 비롯하여 육군 예하 부대가 50년 이상 주둔했다. 민간인은 출입할 수 없던 통제구역이었다. 금나래중앙공원은 군부대가 이전하고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만들어진 기부채납공원이다.

금나래중앙공원 군부대이전 기부채납공원

금천구청역과 공원을 잇는 연결로를 벗어났다. 금나래중앙공원에 도착했다. 공원도 추운 날씨처럼 휑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공원에 사람이 없어서 더 그런 것일까. ‘광장 같은 공원이다. 딱딱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편의시설과 휴게시설이 완만하면서도 거대하게 쌓은 인공 언덕 속에 숨어 있었다. 연속성이 돋보이게 설계된 듯하다. 또 곳곳에 철제 조형물인지, 놀이기구인지 알 수 없는 조형물이 있다. ! 그렇다. 폴리 파크(Folly Park). 철제 조형물이라고 했던 게 장식적 역할을 하는 놀이기구였다. 장식과 기능을 결합한 시설이었다.

금나래중앙공원에는 금천 지역 땅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현충 시설이 있다. 바로 한강방어선 시흥지구 전투사령부 터육군보병학교 터표지석이다. ‘그까짓 표지석이 뭐 대단하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6·25 한국전쟁을 겪은 어른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북한의 남침, 3일 만인 1950628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북한군 손에 넘어갔다. 수도방어에 실패한 국군은 북한군의 한강도하를 막기 위해 국군을 재편성하기 위해 결집했다. 금나래중앙공원이 바로 그곳이다. 국군 최초의 군단급 부대인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김홍일 소장)가 있었다. 창설 당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는 오합지졸이었다. 한강을 건너 철수하면서 중장비 무기는 철수도 못 했다. 통신도 끊긴 상태다. 겨우 개인화기만 들고 남하한 병사가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로 집결했다.

시흥기지 작전사령부터와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시흥기지 작전사령부터와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육군보병학교터와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육군보병학교터와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하지만 1군단 예하 3개 사단 및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북한군과 맞선다는 건 무리였다. 미군 지상군이 투입되고 전투 전개할 때까지 버텨야 했다. 시한은 단3. 국가의 존망이 시흥지구 전투사령부에 달려 있었다. 다행히 시간은 대한민국 편이었다. 무려 6일을 버텼다. 미군 지상군이 투입되기 전 국군의 주력부대를 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전략은 결국 실패했다. 국군과 연합군의 연합전선을 펼 전기를 마련한 셈이다. 찬바람이 불어왔다. 표지석을 쓰다듬는 듯했다. 비바람이 표지석의 아픔을 씻어내기 몇 해인가? 벌써 올해로 꼭 75년이 됐다.

북침 당시 한강 방어선 전투사령부터와 표지석

금나래중앙공원 인근에 있는 서울 독산동 유적 발굴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전시관도 금천구청에서 멀지 않은 롯데캐슬골드파크(1) 단지 안에 있다. 정문 경비실에서 전시관 위치를 물었다. 바로 앞에 있는 커뮤니티센터인 캐슬리언 센터 갤러리를 가리킨다. 별도의 건물이 아니다. 갤러리 안에서도 전시관을 찾아 이곳저곳을 헤맸다. 전시관은 갤러리와 별개의 문을 사용하고 있었다. 전시관이 뒷방살이를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틀리지 않은 듯하다. ‘전시관은 간판조차 없었다. 갤러리 기둥에 포스터 한 장이 전시관의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포스터조차 운동시설과 ATM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문 옆에 붙어 있다. 누가 이곳에 서울시가 관리하는 유적전시관이 있다고 생각이나 할까.

문도 잠겨 있다. 전시관 관람을 위해서는 정문 경비실에서 관람 신청을 하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다. 일종의 방명록을 기록하는 절차였다. 경비실로 가는 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파트 주민인듯한 한 여성에게 전시관 위치를 물었다. 예상한 대로다. 모른단다. 경비원의 안내받아 관람실에 들어갔다. 경비원이 불을 켜 줬다. 설렁했다. 온기가 없다. 관람객 없는 전시관을 홀로 둘러봤다.

전시관에는 삼국시대의 유구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공간은 크지 않았다. 전시관이라기보다는 전시실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하지만 제법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725점이다. 과거 신라가 한강 유역에 진출했던 시기의 생활상을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삼국시대에 이용했을 도로와 수레바퀴 흔적, 건물이 있던 자리, 저수지와 우물터 등이 있다. 또 유적 발굴지의 옛 마을 모습을 미니어처로 복원(?)해두었다. 마치 드라마 세트장처럼 보인다. 어떻든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독산동유적발물관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독산동유적발물관 전시물,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삼국시대 유구.유물 전시 독산동 전시관

2009년 롯데캐슬골드파크를 짓기 위해 지표조사를 시행했다. 그 과정에서 이 많은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유구란 인간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잔존물이다. 또 전시관 한편에 발굴 당시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1,000여 년 전의 마을에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셈이다. 개발과정에서 이들 유물이 사라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관람객 없는 전시관으로 전락하지 않길 바란다.

시내버스를 타고 은행나무거리에 왔다. 탑골초등학교 인근에 있는 고목, 향나무를 찾아가는 길이다. 호암산자락에 있는 달동네다. 2차선 도로를 따라 서민 주택이 줄지어 있다. 주택 사이로 수없이 많은 골목이 이어졌다. 2차선 도로가 언덕을 넘어갈 즈음 작은 골목에 거대한 향나무가 필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줄기와 가지가 비교적 곧게 뻗어 있다. 하지만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이다. 줄기에는 주름살이 역력하다. 그 질감과 입체감은 향나무의 생명력이 아닐까.

향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향나무.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3층석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3층석탑.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향나무 바로 옆에 이름도 없는 3층 석탑이 하나 있다. 안내판의 설명에 의하면, ‘적어도 500년 넘는 석탑이다. ‘자손이 없는 아낙이 이 석탑에 공을 들이면 득남한다라는 구전도 전해지고 있다. 이 동네의 옛 이름은 탑골’, ‘탑곡’, ‘탑시골이라고 했다. 탑이 세워진 동네라는 뜻이다. 이를 볼 때 3층 석탑이 있던 이곳에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다음 차례는 향나무와 3층석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흥선대원군의 별장터로 갔다. 인터넷 검색했다. 별장터에 시흥현대아파트가 지어졌음을 알려줬다. ‘이번에도 표지석 하나 찍고 말겠거니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터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 충격이었다. 별장터가 깨진유리창이 되어 있었다. ‘깨진유리창 이론이라는 게 있다. 이론은 간단하다. 깨진 유리창을 방치하면 그곳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한다는 것이다. 축대 위의 집은 쓰러져 있었다. 축대 앞에 전봇대, 소화 장비함이 있다. 여기는 각종 홍보 유인물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 옆에 흥선대원군의 별장터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문화안내판이 서 있다. 안내판 주변은 말 그대로 쓰레기장이었다. 이곳이 일세를 주름잡은 왕의 아버지 집터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흥선대원군 별장은 서울 대가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별장의 품위를 지키고 있는 것은 축대 위에서 꼿꼿하게 서 있는 한 그루 소나무뿐이다.

흥선대원군.강희맹 표지석  주변...각종 홍보물 덕지덕지

흥선대원군 별장터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흥선대원군 별장터 표지석.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강희맹 선생 거주지 표지석 주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강희맹 선생 거주지 표지석 주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진=김경은 여행작가

사실 흥선대원군의 별장터가 아니면 쓰지 않으려던 게 있다. ‘강희맹 선생이 살던 곳이다. 은행나무거리로 오기 전 시흥동의 마지막 코스로 강희맹 선생이 살던 곳에 갔다. 신흥초등학교 근처에 있다. 골목 안 한 빌라 단지 앞에 그의 흔적이 있었다. 물론 표지석 하나가 전부다. 하지만 실망했다. 표지석 주변은 쓰레기 더미로 쌓여 있었다.

강희맹 선생은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다. 문종과 세조의 이종사촌이다. 필자 생각에 강희맹 선생은 조선학을 창립한 분으로 칭송받아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경국대전등 편찬에 참여했다. 모두가 다 우리 민족의 얼을 정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서적이다. 강희맹 선생에게 부끄러운 후손이 되고만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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