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이후 시기를 한민족의 ‘열국시대(列國時代)’라고 부른다. 이승휴는 <제왕운기> ‘열국기(列國紀)’에서 북부여(北扶餘, 기원전 4세기~494), 동부여, 비류국, 신라, 고구려, 남옥저, 북옥저, 예맥 등이 등장하는 시기를 ‘열국기’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전국(戰國)시대의 진(秦)이 개혁과 부국강병책으로 천하를 통일했듯이, 이러한 역할을 우리나라에서는 ‘북부여’가 맡았다. 이 북부여는 ‘대부여(고조선의 후기 명칭)’의 후신이다.

일제 식민사학이 허구의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우리 사국(신라, 고구려, 백제, 가야) 이전에 존재했던 단군조선과 북부여의 역사를 철저하게 지웠다. 그러나 1922년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남산(男産, 연개소문 셋째 아들)의 묘지명 기록은 북부여의 동명왕(東明王)과 고구려의 주몽(朱蒙)을 명확히 구분한다.

“옛날에 동명은 하늘의 기운에 감응되어 사천(㴲川)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啓國·계국), 주몽은 광명으로 잉태되어 패수(浿水)에 임하여 도읍을 열었다(開都·개도).”

단군조선의 적통을 계승하여 열국의 패자로 부상한 북부여는 해모수(解慕漱)가 세웠다. B.C 108년. 한무제는 동북아의 천자가 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북부여로 쳐들어왔다. 이때 북부여는 유약한 제4대 고우루 단군이 다스리고 있어서 당시 세계 최강의 한나라 군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북부여가 무너지고, 우리 민족이 사라질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마침내 탁리국(橐離國) 출신으로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 고열가의 후손인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분연히 일어나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웠다. 그는 사람됨이 호방하고 영민하여 용병에 능했다. 장수가 되어 사방에 격문을 돌리니 한 달이 채 되지 않아서 5천 명이 넘는 의병이 모였다.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칭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졸본(卒本)에서 즉위한 후 연전연승을 거두니 한구(漢寇)들은 힘없이 무너졌다. 이 동명왕이 북부여를 계승할 때까지 부르던 국호가 ‘졸본부여’(기원전 108년~기원전 86, 22년)이다.

세력이 막강해진 동명왕은 북부여에 사신을 보내 도성을 비우라고 요구하니 병을 얻어 붕어한 고우루 단군의 동생 해부루(解夫婁)가 즉위 후 가섭원(迦葉原)으로 옮겨가니, ‘동부여(기원전 86년~22년, 108년)’의 시작이다.

기원전 86년. 동명왕은 북부여 ‘5세 단군’으로 즉위해 북부여를 정식으로 계승하고, 한(漢-현도군)을 서쪽으로 몰아내어 옛 단군조선의 영토인 요하 일대 동북평원을 차지했다. 동명왕은 졸본부여 22년, 북부여 27년 총 49년간 재위하며 한무제의 강력한 군대를 물리쳐 북부여 사직을 보존하였다. B.C 59년 그가 붕어하자 유명(遺命)에 따라 졸본천(卒本川)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의 ‘추모신화’에 따르면 주몽은 하늘의 기운을 받아 알에서 태어나며, 탈출하는 과정에서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넌다. 그런데 이 내용은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 편에도 똑같이 나오는데, ‘동명신화’라고 한다. 다만 두 신화의 차이점은 두 사람 모두 강을 건너면서, 주몽은 강을 향해 ‘천제의 아들’이라 외치고, 동명왕은 별다른 외침 없이 활을 강에 내리친다.

고구려가 북부여 동명신화를 차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동명왕의 존재는 당대 최고의 전설적인 영웅이었고, 동명신화는 고구려 건국의 명분과 북부여 계승의 정통성을 모두 확보할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건국신화에는 우리 역사에서 소실된 북부여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무제 대군을 격파하여 환국→(신시)배달→(단군)조선의 한민족 역사가 북부여를 거쳐 사국시대로 면면히 이어지는 민족사의 방파제 역할을 한 동명왕을 경모하는 필자의 자작 한시를 소개한다.
 

慾東武帝遠來侵(욕동무제원래침) 한무제는 한사군 설치 위해 요동을 침략했고

高豆諸民一致心(고두제민일치심) 고두막한은 모든 백성들과 마음을 합쳤네

彼寇路窮愁逐北(피구로궁수축북) 한군은 길이 막혀 쫓길게 두려워 북쪽으로 달아났고

我軍倡義長驅任(아군창의장구임) 아군(동명왕)은 의병을 일으켜 먼 곳까지 쫓아냈네

開都繼繼天恩盛(개도계계천은성) 도읍을 여니 하늘의 은혜가 차례로 이어져 채웠고

剖卵承承地靈尋(부란승승지령심) 알을 깨고나온 땅의 신령스런 기운 대대로 이어졌네

戡難祖宗千萬世(감난조종천만세) 국난을 평정한 시조 조상은 천만대 동안

靑丘史上白雲岑(청구사상백운잠) 우리나라 역사상 흰구름 같은 봉우리이네

일요서울 논설주간 우 종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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